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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추적 이은상] (4) 노산 이은상의 이승만 대통령후보 지지와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

전점석 마산역사문화유산보전회 운영위원 jjseuk@tistory.com 입력 : 2018-03-06 10:53:57 화     노출 : 2018-03-06 11:06:00 화

1960년 2월 13일 정·부통령 후보등록 마감일에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내무부 최인규 장관과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키라는 공개적인 지시였다.

당시에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서로 다른 정당에서 나올 수 있었다. 자유당 정권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야당 지지성향과 투표결과를 분석하면서 정상적인 선거를 통해서는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부터 관권을 동원하여 '1960년 정·부통령 선거'를 부정하게 치를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 1956년에도 부통령에 나선 이기붕은 장면에게 근소한 표 차이로 패배했던 것이다. 이승만도 야당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가 선거 기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무사히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그리고 1960년 선거에서도 비슷하게 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선거를 한 달 앞두고 미국에서 치료 받다가 갑자기 죽었다. 야당의 부통령 후보는 역시 장면이었다. 4년 전과 똑같이 이기붕과 장면의 재대결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은 무난히 되더라도 이미 85세의 고령이어서 중도에 대통령직을 부통령이 승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참모들의 판단으로 인해 무리한 부정선거를 사전에 더욱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일찍부터 기획하였다. 자유당 정권이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날짜를 3월 15일로 정한 것은 3월 26일이 이승만 대통령의 만 85세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자유당의 온건파를 이끌었던 이재학 국회 부의장의 증언에 따르면 자유당 강경파는 "노인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 탄신일 이전에 당선시켜 드린 다음 탄신일을 거족적인 축일로 하자"고 조기선거를 밀어붙였다고 한다.

이런 배경에서 준비되고 진행된 선거운동에서, 3·15의거가 있기까지 노산은 전국을 돌며 이승만을 이순신에 비유하고 그를 국부로 추앙해야 한다며 문인유세단을 이끌고 선거지원유세를 했다. 2월 27일, 자유당 대구유세에 참석한 이은상, 김말봉 등은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 이 유세에는 공무원, 학생뿐만 아니라 인근 시골 사람들까지 동원하였다. 다음날인 2월 28일, 노산이 지지유세를 한 대구를 시작으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전국적으로 있었고 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 반공예술단(단장 임화수) 그리고 정치깡패 이정재 등의 민주인사에 대한 살인, 테러, 폭행이 일어났다. 서울신문 2월 28일 자에는 '28일 인천유세에 이어 실시된 동당의 전국유세 계책은 다음과 같다. 5일 하오 2시 대전 이은상'이라는 홍보 기사가 실렸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예가 있는데 <민족의 해와 달>이라는 책이다. 저자인 장건은 이 책에 실린 '님은 겨레의 운명이다'라는 시를 통하여 공공연히 이승만을 민족의 해, 이기붕을 민족의 달이라고 찬양하였다. 정부 공보처는 수천 권을 구입하여 학교와 관공서에 보냈다. 기독교에서도 범교단적으로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해서 '대통령은 장로인 이승만 박사, 부통령은 권사인 이기붕'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각 지역별로 선거대책위원회 지부도 조직되었다. 자유당 정권의 공보실장 전성천이 목사였고 내무부장관 최인규도 교회 집사였다. 북한에서는 1955년부터 주체사상을 내세운 김일성을,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각각의 태양으로 우러렀다. 1950년대 한반도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국민들은 짙은 어둠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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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장례식 모습. /e영상역사관 대통령 기록사진

서울신문 3월 5일 자에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 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 고 보도했다. 이어서 3월 9일 오후 1시에는 마산 무학초등학교에서 정·부통령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강연회가 열렸는데 3·15기념사업회에 의하면 노산이 이 강연에 참여하여 선거유세를 했다. 선거유세 홍보물에는 박종화, 황성수, 이은상, 조연현 등 연사가 4명이었다. 박종화(1901~1981년)는 본관이 밀양이고 <금삼의 피>, <다정불심>, <여인천하>, <임진왜란> 등의 인기 있는 역사소설가였다. 황성수(1917~1997년)는 본관이 창원인 자유당 국회의원이었다. 조연현은 함안에서 출생한 문학평론가였다. 노산이 무학초등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기억하는 분도 있다. 이 당시에는 문학평론가 조연현, 소설가 김동리, 시인 김종문 등 많은 문인들이 이기붕을 찬양하는 글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서정주는 이승만 전기를 쓰고 그 대가로 30대 초반에 이승만 정권 초대 문교부 예술과장을 역임했다.한편 시인 조지훈조은 자유당 정권의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수필 '지조론(志操論)'을 1960년 <새벽>에 기고하여 동료 문인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에서 조지훈은 식민지 시절 친일파였던 무리들이 해방 이후 과거 친일 행적에 대한 반성은커녕 도리어 정치인이 되어 당당하게 행세를 하고, 심지어 한 때 지조 있는 모습을 보이던 일부 정치지도자들마저 거리낌 없이 변절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조지훈은 '지조'와 '변절'의 개념을 대비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 속에서 지조와 변절의 길을 걸었던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조지훈은 1950년대 말 독재 정권과 이들에게 빌붙어 지조나 신념도 없이 변절을 일삼는 무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민영환, 이용익처럼 후에 자신의 행적을 반성한 경우에는 그 변절을 용서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지금 비난받는 자들이라도 열심히 자기 성찰에 힘쓰고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였다. 만년에 자신이 엉뚱하게도 정치 교수로 몰려 당국에서 기휘(忌諱)하는 인물로 찍히자 항상 사직서를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대쪽 같았다.

조지훈은 노산보다 17살 아래였다. 1942년 봄,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가 열일곱 살 때 드나들던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무보수로 이윤재, 이중화, 정인승, 한징들을 도와 객원 편집원으로서 우리말 사전 편찬에 힘을 보탰다. 그해 10월 1일에 그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함흥경찰서에 사전편찬에 종사하던 회원들이 모조리 붙잡혀 연행되는 현장에 함께 있었다. 요행히 그는 조선어학회 정식 회원이 아니고 객원으로서 잠깐 왔다가 카드정리를 도왔을 뿐이라는 선배들의 변명이 통하여 그날의 연행은 모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늘상 감시받는 대상이 되었다. 함흥교도소에서 죽은 이윤재, 한징을 위하여 해방 후 9월, 서울 천도교 회관에서 두 분을 위한 추도식을 할 때 조지훈은 고향 영양에서 올라와서 눈물로 이 일을 거들었다.역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천관우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하고 있던 1950년대 말이었다. 사장실에서 사환 아이가 문건 하나를 가져다주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한시 한 편이었다. 물론 우리 한글로 번역한 것인데 역자는 바로 노산 이은상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천관우는 "아니 노산께서 이런 일도 하는가"하고 크게 실망하였다. 그동안 자신이 편집국장 자리에 있으면서 노산이라는 사람의 남달리 결곡한 성품을 비롯하여 널리 애창되며 회자되고 있는 '가고파' 노래의 작사자로서도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나 그밖에도 새해 첫날의 권두시 같은 것도 그이에게 부탁을 드리곤 했었는데 바야흐로 지금 이때가 어느 때인데 고작 이런 정신 빠진 짓이나 하고 있는가 싶었다고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이 한시는 신문에 실리지는 않았다. 올곧은 언론인으로서의 천관우였던 것이다. 정부 공보실이 1959년에 발간한 <雩南詩選>은 이은상 역서로 출판되었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있기 열흘 전인 3월 6일에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에서는 이승만 박사, 이기붕 선생 출마 환영 예술인대회라는 것이 열렸다. 불과 2, 3년 뒤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이정재, 임화수 등이 주도하였다. 연예계 권력자였던 정치깡패 이정재와 임화수는 당대의 인기배우와 가수들을 총동원해 이승만과 이기붕의 당선을 기원하는 공연을 열었다. 이 대회에서 이 나라 문화예술인이라는 사람들은 잔뜩 주눅 든 얼굴로 덜덜 떨며 하나같이 머리띠를 두른 채 이승만! 이승만! 이기붕! 이기붕! 하고 누군가의 선창에 따라 소리소리 질러대고 있었다. 대부분의 가수와 배우들이 협박에 못이겨 이 자리에 나갔지만 영화배우 장동휘는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참석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동휘는 연기만 할 줄 아는 배우가 아니었다.

3·15와 4·19의 격동을 지나서 5월이 되었다. 노산과 나이가 같은 작가 김팔봉은 '부정선거와 예술인의 지성'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대통령 선거 시의 서울신문을 인용하면서 노산이 이승만 대통령의 당선을 위한 선거유세를 하였다는 내용을 꼬집은 글을 <사상계> 5월호에 투고하였다.

'그전에 대구에서 개최되었던 자유당 유세강연회에서는 이은상 씨가 지금 시국을 임진란에 비교하면서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 라는 말을 했다. 신문기사가 반드시 1자 1구 정확하게 강연한 사람의 말을 보도하는 것이라고는 꼭 믿지 않거니와 그래도 권위 있는 신문의 기사 내용은 대체로 사실과 틀림없는 것이라고 믿는 터이니…'

실명을 거론하면서까지 동료 예술인이 부정선거에 적극 나선 것을 지적하는 글을 <사상계>에 게재한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자세이고 노산뿐만 아니라 꽤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독재부역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산 문화예술계 인사는 별로 많지 않았다. 김팔봉은 10년 후인 1970년, 마산에서 가고파 시비를 세운다고 했을 때 건립위원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10월 24일의 시비 제막식에도 참석하여 축하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정선거에 참여한 노산의 잘못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노산과 권력자와의 관계는 여전하였다.

3·15, 4·19가 있은 지 한 달 후였다. 1960년 허정 과도정부는 4월 29일 첫 번째 국무회의에서 4·19의거기념탑 건립을 맨 먼저 의결하고 제작자 공모를 하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재건국민운동본부(본부장 유달영)가 주도하여 전 국민의 성금으로 1962년 기공식을 갖고 1963년 9월 20일 준공식과 기념탑 제막식을 하였다. 조각가 김경승이 제작한 이 탑은 화강암 탑주 일곱 개를 중심으로 주위에 수호자상과 만장을 두른 형태이다. 당시 최대의 기념탑 공사였고 국내 최대의 화강석 부조작품으로 총길이가 56m이다. 당시에 김경승과 유달영이 한때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는 구설수도 있었다. 김경승은 묘하게도 4·19기념탑 뿐만 아니라 4·19 때, 시민이 부순 서울 남산 이승만 동상(조각가 윤효중 제작) 대신에 1988년, 이화장에 작은 규모의 이승만 동상도 만든 조각가이다. 이은상이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위해 글을 썼듯이 김경승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위해 동상을 만든 것이다. 두 사람은 생각이 비슷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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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시위 모습.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은 이승만 대통령을 이순신으로 떠받들었던 노산 이은상이 썼다.

1960년 4월 19일 /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 피의 전통이 용솟음 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 만 명의 학생 대열은 /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 민주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 해마다 4월이 오면 / 접동새 울음 속에 /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 해마다 4월이 오면 /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노산에게 진달래는 우리나라의 꽃이고 남북 강산에 피는 꽃이다.

만약, 마산 3·15의거 이전의 노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비문을 읽으면 너무나 감동적일 것이다. 그러나 부정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이승만, 이기붕 후보 지지유세를 한 사람이 이 기념탑 비문을 썼다는 걸 알게 되면 무척 당황스럽다. 마치 속은 기분이다.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을 버젓이 쓰는 그 뻔뻔스러움은 문학을 하는 우리로서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고 하였다. 비문에서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는 부분은 어떤 뜻일까? 3·15와 4·19가 일어나기 3년 전인 1957년에 쓴 '학생의 날의 현실적 의의 -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글을 보면 '충무공의 피, 3학사의 피가, 아니 저 3·1의 제물 유관순의 피까지 우리 학생들의 혈관 속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그 날 그 같은 의거가 감행되었던 것' 이라고 하였다. 노산이 작사하여 1953년에 제정한 '학생의 노래' 2절에서도 '우리는 피 끓는 젊은이다. 보라 전통의 힘, 한 가슴 찼다. 내 겨레 위해서라면 총, 칼 앞에라도 달겨들마'라고 하면서 역시 전통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피의 전통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노산이 3·15를 불상사, 무모한 흥분, 과오,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라고 하였다. 그런데 3·15에 관한 수많은 시 중에서 노산처럼 '불상사'라고 표현된 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그 시인들의 역사의식이 노산보다 훌륭해서일까 아니면 세월이 많이 흘렀기 때문일까? 누구나 그럴 수 있다. 당시에는 그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처음과는 다른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누구나'에 노산을 포함시킨다면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서 망설여진다. 일반인들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마산시민이 좋아하는 '가고파'를 지은 노산이 사건 발생 한 달 후에는 '무모한 흥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3년 정도가 지나니까 비로소 불의에 저항한 '피의 전통'인 줄 알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너무나 실망스럽다.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는 2005년 4월 11일 경남도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서울의 4·19묘지에 있는 사월학생혁명기념탑문의 철거를 정부에 요구하였다. 이유는 독재권력에 힘을 보탠 노산 이은상의 글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이 단체는 청와대와 국가보훈처 등에 철거를 요구하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조시인 김복근은 엉뚱하게도 4·19학생혁명기념탑 비문을 근거로 노산이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염원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고 하였다. 노산이 이 비문을 쓰기 전과 후의 삶에 있어서 독재권력과 어떤 관계였으며 독재권력의 횡포에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모르는 것 같다. 노산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지 진정한 민주주의를 염원하지는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서거하였다. 90세였다. 7월 23일 하와이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히컴 공군기지를 거쳐서 유해를 실은 미 공군 수송기는 '고향생각'이 연주되는 가운데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과로로 입원하여 서울에 오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이효상 국회의장, 조진만 대법원장 등 3부 요인들이 공항에서 유해를 맞이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승만은 영친왕 이은(李垠)의 귀국을 막았는데 박정희는 이은의 귀국은 허용하면서 생전에 이승만의 귀국은 불허하였다. 상주 이인수와 8군 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 장군이 하와이에서부터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유해를 모시면서 장례절차를 진행하였다. 장례는 가족장이었다. 왜냐하면 7월 20일 국무회의에서 국민장으로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 야당과 다수 언론 그리고 4월혁명동지회, 4·19부상동지회 등은 국장이든 국민장이든 사회장이든 결사반대였다. 박정희 정권 역시 국장보다 격이 낮은 국민장으로 하겠다는 입장이어서 실망한 유족들이 가족장을 선택한 것이다. 7월 27일, 국립묘지에 안장되기 직전에 간단한 영결식이 있었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정일권 총리를 대리참석토록 했고 정 총리는 노산이 쓴 조사(弔辭)를 읽었다.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원훈(元勳)이요, 건국 대통령'으로 지칭하면서 시작된 조사에서는 '길이 이 나라의 호국신(護國神)이 되셔서 민족의 다난한 앞길을 열어주시는 힘이 되실 것을 믿고 삼가 두 손을 모아 명복을 비는 동시에 유가족 위에도 신의 가호가 같이 하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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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후보, 이기붕 부통령후보 선거벽보.

시조시인 김교한은 노산이 '정치권력과는 먼 거리에 있는 단체에서 봉사했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대체로 옹호하는 입장에 섰지만 그의 일관된 진심은 민족사랑, 조국사랑이 바탕이었다' 고 한다. 시조시인 이달균 역시 노산의 삶에 대해서 '아쉬운 점도 있다. 자유당 때 강연을 다녔고 군사정권에 일정 부분 부역한 것은 오점으로 남아 있다'고 하면서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기억하자'고 한다. 옳은 이야기다. 당연히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균형 있게 기억해야 한다. 순수한 봉사는 훌륭한 일이다. 그런데 노산은 정치권력과 아주 가까운 단체에서도 열심히 활동했다. 자유당 때에는 강연을 몇 번 다닌 정도가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과는 일정 부분이 아니고 헌신적으로 부역하였다는 점 때문에 '가고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과연 노산 이은상은 우리에게 반면교사인가? 정면교사인가?

<참고문헌>

- 이우태, 3·15의거의 회고와 그 정신계승, <3·15의거> 2017년 제18호, 3·15의거기념사업회, 85쪽

- 마산지역 노동운동의 선구자인 소담 노현섭의 2월 16일 자 육필일기에는 '시간은 오후 9시, 다방에 갔더니 신문 호외 한 부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병옥 박사의 사망이라는 돌연한 비보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이상용 옮김, <민족이여 겨레여>, 노현섭기념사업회, 미르인쇄(2014년), 96쪽)

- 홍석률, <민주주의 잔혹사>, 창비(2017년), 192쪽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3. 혁명전야>, 조선일보사(1998년), 145쪽

- 한겨레신문 2014년 1월 5일 자, 길을 찾아서, 대구2·28 데모 이끈 경북고 이대우의 패기

- 노산과 김말봉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친하게 지냈다. 김말봉의 딸 전혜금은 1943년 작곡가 금수현과 결혼하였다. 1968년에 결혼 25주년의 은혼식을 하였는데 최현배, 이은상이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고 김말봉, 이영도도 참석하였다. 금수현은 김말봉의 '그네', 이영도의 '구름'을 작곡하였다. 1953년 부산 피난시절의 강원용은 평소 누나처럼 여기고 있던 소설가 김말봉과 자주 만났다.(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2, 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2003년), 164쪽), 밀양 수산이 고향인 김형윤(金亨潤)은 김말봉의 남편 이종하와 고향이 같은 인연으로 친하게 지냈고 노산 이은상은 김형윤과는 보통학교 같은 학년이었고 김말봉과는 친누나처럼 친하게 지냈다(김형윤, <마산야화>, 도서출판 경남(1996년), 348쪽)

- 장건, <민족의 해와 달>, 여론사(1959년)

- 강원용, <역사의 언덕에서 2, 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2003년), 341쪽

- 김재현, 문화권력 이은상, <이은상 조두남 논쟁>, 도서출판 불휘(2006년), 505쪽

- <이은상 조두남 논쟁>, 도서출판 불휘(2006년), 185쪽

- 조연현(1920~1981년)은 대학 재학시절부터 친일잡지 <동양지광>에 '동양에의 향수', '아세아부흥론 서설' 등의 친일평론을 썼다. '아세아부흥론 서설'은 대표적인 친일작품으로 꼽히는데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극구 찬양함은 물론 이 땅의 청년학도들이 아시아 부흥의 투사로서 나서줄 것을 노골적으로 부추기고 있다. 조연현의 3·1문화상 수상과 심사위원 위촉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김삼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42, 43, 189쪽

- 하성환, <진실과 거짓, 인물 한국사>, 도서출판 살림터(2017년), 143쪽

- 지훈, 1920~1968년, 본명 동탁, 경북 영양 출생, 1939년 정지용 추천으로 문장지에 등단, 한국시인협회장,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 문중13회 카페 cafe.daum.net/mj13h, 우리들의 이야기, 5291 권력과 문인(2016.12.1.) 

- Daum백과에서 인용

- 홍일식, 엄숙한 지성의 분노를 보여주신 조지훈 선생, <스승>, 김태준 외, 도서출판 논형(2008년), 361쪽

- 홍일식, 엄숙한 지성의 분노를 보여주신 조지훈 선생, <스승>, 김태준 외, 도서출판 논형(2008년), 357쪽

- 홍일식, 엄숙한 지성의 분노를 보여주신 조지훈 선생, <스승>, 김태준 외, 도서출판 논형(2008년), 358쪽

- 천관우(1925~1991년)는 일석(一石) 이희승을 존경하여 거기서 한자를 빌려서 자신의 호를 후석(後石)이라고 지었다. 경성제대 예과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국사학과를 졸업, 1958년, 33세에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연합신문에서 이름이 바뀐 서울 일일신문 주필,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필, 전두환 정부의 국정자문위원 역임, 친형은 민세 안재홍의 동서

-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2, 국제신문 2004년 2월 10일 자

- 소설가 이호철의 한국문단 이면사 14, 국제신문 2004년 2월 24일 자

- 카페 맑은 물 흐르는 곳, cafe.daum.net/amos5095, 세상사는 이야기, 연예인이라는 이름의 민주시민 (2011.6.8.) 김창남

- 김팔봉, 1903~1985년, 식민지 치하의 조선문단에 프로레타리아문학의 씨를 뿌리고 그 운동을 이끌었던 팔봉은 1938년 매일신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고 총독의 선정과 황민화정책을 찬양, 홍보하였다. 1940년 이후에는 '마닐라 점령',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 '신전의 맹서' 등의 글을 쓰면서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하였다. 미영격멸 국민궐기대회로 강원지방 순회강연을, 조선언론보국회의 전국순회강연회 경북지방 연사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6·25전쟁 때에는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회장을 역임하였다.(김기진, 김철, <친일파 99인 3권>, 돌베개(1993년), 91~96쪽) 김팔봉의 3·1문화상 심사위원 위촉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김삼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43쪽)

- 1960년 3월 10일 자 서울신문 보도내용 인용

- 김봉천, <노산 이은상 선생>, 창신고등학교(2002년), 101쪽

-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는 5·16군사정변 이후 제정된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에 의거 1961년 6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거 설립된 범국민 중앙행정기관이었다.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산하에 신설하고, 중앙위원회는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 4조에 의거 장관급 기관으로, 지방위원회는 각 지방자치단체 산하에 신설. 그 후 1964년 8월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가 설립되어 운영되어 국가재건국민운동본부 기타 행정 업무는 내무부로 이관되었으며, 1975년 12월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중앙회는 새마을운동중앙회로 흡수 합병되었다. 1961년 출범 당시 초대 본부장은 유진오였지만 2개월만에 사임하였고 9월부터 류달영이 본부장으로 1년 8개월간 열심히 재직하였다. 63년 5월부터는 이관구가 제3대 본부장이었다. 1966년에는 김기진이 본부장을 역임하였다

- 김경승, 1915~1992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연이어 조선미술전람회 조각부에 입선하고 '목동', '여명'이라는 작품으로 총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였다. 이 전람회는 심사위원장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고 식민정책에 반하는 작품은 출품이 금지되어 있는 행사였다. 해방 후 친일혐의가 뚜렷하다는 이유로 조선미술건설본부 결성 때 제외되었다. 조각계의 일인자인 윤효중이 이승만 대통령과의 유착으로 4·19 이후 기세가 꺾이자 항일, 친일을 구분하지 않고 이순신(서울, 부산1955년, 통영1953년), 김성수(1959년), 윤치호, 안중근(서울 남산, 1959년), 김구(서울 남산,1969년), 안창호, 전봉준 동상, 육영수상, 4·19국립묘지 수호상, 4·19학생혁명기념탑 등을 제작했다. 윤효중이 죽고 난 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그의 활동은 전국을 휩쓸 정도로 대단했다(다큐인포, <부끄러운 문화답사>, 북이즈(2004년), 256쪽) 김경승의 3·1문화상 수상이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김삼웅, <친일파 2권>, 학민사(1992년), 42쪽)

- 30대 초반인 1932년 3월과 50대 후반인 1960년 3월에 각각 '진달래'라는 시조를 썼었다(이은상, 조선 風味의 진달래, <노산문학선>, 탐구당(1964년), 275쪽)

- 경남시사랑문화인협의회, 명백한 독재 옹호자 노산을 누가 편드나, <이은상 조두남 논쟁>, 도서출판 불휘(2006년), 562쪽

- 이은상, <노산문학선>, 탐구당(1964년), 459, 463쪽

- 해방 후 1929년 11월 3일을 광주학생운동기념일로 지켜오다가 1953년에 문교부는 이날을 학생의 날로 정하고 일제시대 의거에 근거지였던 광주 서중학교 동창회의 발의로 본교 교정에 학생탑을 세우고 학도호국단 이름으로 전국의 大, 中, 小학교를 통하여 제창할 수 있는 학생의 노래를 제정하였다. (이은상, <노산문학선>, 탐구당(1964년), 459쪽)

- 경향신문 2005년 4월 12일 자

- 김복근, <노산시조론>, 도서출판 경남(2013년), 184쪽

- 조갑제, <박정희 7권 격량을 뚫고서>, 조갑제 닷컴(2006년), 329쪽

- 조갑제, <박정희 5권 문제는 경제야>, 조갑제 닷컴(2006년), 184쪽

- 오동룡,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정신 회복해야 대한민국이 산다, 이승만 탄신 142주년, 월간 조선 2017년 7월호

- 조갑제, <박정희 7권 격량을 뚫고서>, 조갑제 닷컴(2006년), 332, 334쪽

- 이달균 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 경남시조시인협회, 도서출판 경남(2017년), 44쪽

- 이달균 외, <가고파, 내고향 남쪽바다>, 경남시조시인협회, 도서출판 경남(2017년), 163쪽

- 소설가 조정래가 2007년 금아 피천득 영결식에서 조사를 하면서 고인을 일컬어 정면교사라고 했다(한겨레신문 2017년 5월 8일 자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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