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 오토바이 타고 유라시아 횡단] (1) 출발 그리고 러시아
잊지 못할 추억 만들고자 12살 아이와 여행 결심
4개월 동안 18개국 누벼 배 타고 러시아로 출발
소도시 우수리스크 도착 독립운동가 생가 둘러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유라시아 대륙. 김해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최정환(47) 씨는 광활한 초원과 황폐한 사막이 때론 끝없이 펼쳐지는 유라시아로 향했다. 이동 수단은 1000cc 모터사이클, 동행자는 12살 아들이다. 지난 2017년 6월 11일에 떠난 부자는 그해 10월 12일 집으로 돌아왔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을 거쳐 그리스, 불가리아, 세르비아를 지나 프랑스, 스페인까지 모두 18개국을 누볐다. 이동거리만 3만 2000㎞에 달한다. 어린 아들과 함께 떠난 여행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렵고 힘든 고비 속에서도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했으며 따스한 마음을 나눴다. 무엇보다 아이와 아빠는 123일간 단순한 부자 관계를 넘어 둘도 없는 든든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아이의 생각과 마음은 그 사이 자란 키만큼 한 뼘 더 성장했다고 한다. 여행은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길들 중 하나임을 깨달았다는 최 씨. 무수히 많은 길을 돌고 돌아 가족의 품에 안기기까지, 도전과 모험의 연속이었던 여정 속으로 안내한다.

김해에서 선술집을 운영하는 최정환(오른쪽) 씨와 아들은 작년 6월부터 10월까지 유라시아 횡단길에 올랐다.

본격적으로 여행길에 오르기 전날, 아들을 뒤에 태우고 김해에서 출발해 강원도 동해항까지 약 300㎞를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과 함께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거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아들과는 2016년 봄에 각자의 자전거를 타고 인천 정서진부터 낙동강 하구언까지 633㎞ 거리를 2박 3일 만에 국토종주에 성공한 추억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 가까워지면 한없이 가깝지만 대개는 남자만의 서먹함이 평생을 따라간다. 아들은 머리가 커지면서 친구를 만나게 되고 군대시절을 거쳐서 직장생활을 하다 결혼을 하게 되면 새로운 가족을 돌보느라 자연스레 아버지와 관계가 멀어진다. 나도 아버지와 서먹한 그런 아들이다.

▲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관./시민기자 최정환

나중에 커서 서먹하고 멀어지더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아들과 잊지 못할 조그만 추억이라도 만들자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다. 아이가 커서 아빠와 함께 고생하며 세계여행을 했다는 것을 지나간 사진 한 장 보며 기억해주길 바란다.

2017년 6월 11일 낮 12시 즈음, 우리는 동해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에 올랐다. 세관에서 일시수출입신고를 먼저 하고 오토바이를 배에다 실은 후 객실로 오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1주일에 한 편 정기운항하는 카페리가 있다. 많은 여행객이 배에다 차를 싣고 또는 오토바이를 싣고 설렘을 안고 떠난다.

대부분이 러시아 사람이었지만 그중에 항일유적지 답사를 떠나는 한국 단체 여행객도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오토바이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러시아 바이커도 있어 간단히 인사를 나눴다. 우리가 탄 배는 500㎞ 되는 항로를 시속 30~35㎞ 속도로 운항하고 있었다.

▲ 블라디보스토크 바이크클럽 회원들./시민기자 최정환

다음날 낮 2시께 드디어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항구의 모습은 낯설었다. 한국과는 다른 건축양식과 해안에 늘어선 군함이 이곳이 러시아 극동지방 군사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인걸 실감할 수 있었다.

러시아 세관의 오토바이 통관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다음날 오토바이를 찾고자 부두로 다시 갔다. 때마침 어제 배에서 만났던 러시아 바이커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All bikers are brothers(모든 바이커는 형제다)."

한국에선 오토바이 바이커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다르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오토바이 바이커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바이커끼리는 형제처럼 친근하게 다가온다.

어제 배에서 잠시 만난 인연 하나만으로 그리고 아들을 뒤에 태워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간다고 이야기하니 그들은 우리의 여행을 응원해준다며 블라디보스토크 유명 관광지를 관광시켜주었다. 일반 관광객은 가기 어려운 과거 일본군이 설치한 해안포대 진지까지 보여주었다.

이제 12살 되는 아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밌는 시간이 되었다. 또 미리 예약했었는지 바닷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러시아 전통음식까지 대접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떠나는 우리에게 안녕을 기원한다며 같이 길을 달려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시 경계까지 배웅을 나왔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들이다.

▲ 동해항 출항 시 페리 안에 실린 바이크들./시민기자 최정환

아들과 나는 이제 본격적으로 유라시아 횡단 길에 올랐다. 앞으로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설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오토바이에 달린 박스와 가방엔 텐트와 침낭 그리고 이번 여행 기간 갈아입을 옷가지들과 취사도구가 들어 있다. 아이와 함께 가다 보니 짐은 더 늘어난다.

포장된 도로야 어찌어찌 간다지만 우리의 여행 경로인 몽골과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의 비포장도로를 엄청난 짐을 싣고 어찌 갈 수 있을지 걱정이 조금 앞서기도 했다.

걱정은 미뤄 두고 현재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우리가 도착한 도시는 우수리스크라는 작은 도시였다. 이 도시엔 일제 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한 최재형 선생님의 생가가 있다.

최재형 선생님은 대한제국 시대에 해외에서 대표적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중 한 분이시다. 자신이 번 큰돈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이상설 선생님의 유허비도 찾아갔다. 이상설 선생님은 만주, 연해주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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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이렇게 먼 곳까지 오셔서 독립운동을 하셨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고려인문화관에도 들렀다. 조선인이 연해주에 정착하게 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우리나라 사람이 이곳에 살았는데 예전 소련이 그들을 강제로 먼 나라로 보내 농장에서 일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코리아 사람이라서 고려인으로 불렸단다.

다시 길을 나서 북쪽으로 향했다. 달레네친스크로 가는 길에 소나기가 몇 차례 내렸다. 땅이 넓어서 그런지 이쪽의 맑은 하늘과 저쪽의 흐린 하늘이 모두 다 보였다.

우리가 가는 쪽 하늘에 먹구름이 보이면 잠시 후엔 꼭 비가 내렸다. 나는 저 멀리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하면 오토바이를 세우고 아들에게 미리 비옷을 입게 했다. 그래서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도 비 맞을 일은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늦게 출발했기 때문에 밤이 꽤 깊어서야 연해주 달레네친스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이곳은 땅도 넓지만 하늘은 더 넓다. 높은 산과 건물이 없고 오로지 넓은 들판만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찻길에 차도 많이 없고 큰 화물차도 우리에게 먼저 가라며 길을 비켜준다. 달리다 보면 아들은 오토바이 뒤 박스에 기대어 잠깐씩 졸기도 한다. 아이 자리 양옆에 있는 옷가방이 팔걸이가 돼 줘서 불편하지 않다. 나는 아들과 벨트로 묶고 달리기 때문에 아들이 떨어질 염려는 없다.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한 4개월의 유라시아 횡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민기자 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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