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제8편 - 에필로그

녹두장군을 선봉에 내세웠던 동학농민전쟁은 일본군이 앞세운 서양무기 앞에 괴멸(壞滅)된다. 만약 신하늬의 주장대로, 아니 하늬는 시인이 만든 가공의 인물이라서 차라리 신동엽의 주장이라 보면 될 것 같은데, 농민군이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여 정권을 바꾸는 혁명, 내지 개혁으로 이어졌다면 갑오농민전쟁의 비극적 이미지가 지금처럼 선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길로 서울로 밀고 올라가 / 중심을 도려냈어야 했습니다, / 봉준형, // 전주성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 그길로 서울 직충했더면 / 벌써 스무날 전에 우린 / 한양성 점령할 수 있었죠, // 왜놈과 / 뙤놈들의 상륙하기전, // 중앙에 / 동학농민혁명위원회를 / 조직하고, // 동과 서에 / 국제의 사다리 / 내려 걸쳤더면. / <중략>

- <금강> 2부 18장 중

10월 21일, 무서리 내린 아침 / 세성산 유진(留陣)했던 농민군 전초부대가 / 왜군 기관포대의 기습으로 / 전멸됐다는 소식이 / 본부에 들어왔다. // … 그 우금티 고개에서 / 동학군은 악전고투했다, / 상봉능선에 / 일렬로 배치, / 불을 뿜는 / 왜군 제5사단의 / 최신식 화력, / …

- <금강> 2부 20장 중

10월 25일 / 공주 우금티의 결전 이후 / 일본군과 이왕병은, 패잔한 농민군, 농민군 가족, / 농민군에게 밥 지어준 부녀자들까지, 수색, 추격, / 총으로 쏘고 칼로 찔렀다, // <중략>

1895년 3월 29일, 아침부터 / 줄기차게 비가 왔다, // … 그리고 오후 세시, 돌문 밖 // 질경이랑 반지꽃이랑 냉이랑 / 예쁘게 돋은 흙언덕 / 높은 장대 위, / 교수된 / 전봉준의 머리는 / 칼로 다시 잘리어 / 매달리었다, // … 그는 / 목매이기직전 / 한마디의 말을 남겼다 // "하늘을 보아라!" // 그의 곁엔 / 고창에서 체포된 손화중, / 최경선, 김덕명(金德明), 성두한(成斗漢)/ 의 머리가 나란히 효수됐다. // … 그리고 / 며칠 후, 서소문 밖 / 장터 네거리엔 전주 숲정에서 참수된 김개남, 성재식(成載植)의 / 머리가 효수됐다. … 그 무렵 / 한양성에 들른 영국 관광객 / 비숍 여사는, 표현했다, 효수된/ 혁명지도자들, / 얼굴마다, / 서릿발이, 엄숙하고 / 잘생겼더라고, / …

누가 꺾었나, // 그러나 꺾였을까? // '밀알 한알이 썩지 않으면 / 언제까지나 한알로 있을 뿐이나, / 땅에 떨어져 썩으면 / 더 많은 밀알 새끼 치느니라.'

- <금강> 2부 23장 중

1894년 3월 전라도 무장을 가득 메운 동학농민군, 그 수가 워낙 많아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하였다. 죽창을 쥐고 흰옷을 입은 농민군의 대규모 열병식 모습을 그대로 그린 말이다. 농민군이 아무리 많아도 구식 화승총 몇 자루와 죽창으로는 일본군이 보유한 영국제 기관총의 위력을 당할 수 없었다.

녹두장군은 붙잡혀 서울로 압송된다. 법무아문(法務衙門) 임시재판소가 신문과정을 기록한 <전봉준 공초(供草)> 1895년 2월 11일 자 문답이다.

문: 동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주장하며 무엇을 공부하는가?

답: 마음을 다잡고 충효를 근본 삼아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것이다.

문: 그대 역시 동학을 매우 좋아하는가?

답: 동학은 마음을 다스리고 하늘을 우러르는 가르침이기에 무척 좋아한다. 동학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경주에 사는 최제우가 시작하였다.

문: 다시 봉기했을 때 최시형과 의논하였는가?

답: 의논하지 않았다.

문: 최시형은 동학의 우두머리다. 그런데 동학의 무리를 규합하는데 어찌 의논하지 않았는가?

답: 충의는 각자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어찌 최시형에게 의논한 후에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

실패한 혁명은 반란으로 몰린다. 전봉준은 고려 때 평양천도와 북벌을 주장한 승려 묘청이나, 앞서 조선 순조 때 지역 차별, 세도정치 타파를 외치며 정권에 도전한 평안도의 홍경래와 혁명가로서는 닮았다. 잘은 모르지만 전봉준의 봉기는 종교를 통한 세력의 규합이라는 점과 <공초>에서의 답변대로 그가 한울님을 맘속에 극진히 모신 사람이라는 데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그가 목매이기 직전 "하늘을 보아라!"고 외칠 수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하나 짚어보자. 대체 동학과 전봉준이 말하는 '한울님을 모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전봉준의 <공초> 답변에서 그 뜻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전봉준은 '동학이 공부하는 것은 마음을 다잡는 것이며, 동학의 주장은 충효를 근본 삼아 보국안민에 있다'고 했다.

'마음을 다잡는다'함은 진심(盡心)을 말한 것이다. 들뜨거나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바로잡으면 마음의 한 가운데, 혹은 본래의 자리인 충(忠)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충(忠)의 본래 의미는 편견에 빠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르침을 모르는 혁명은 자칫 분노와 파괴에 빠져 반(反)혁명이 될 수 있다. 이념의 도그마 역시 좌와 우익(右翼)으로 편을 갈라 끝 모를 당파적 투쟁을 낳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동학의 주장대로 충성스런 사람과 효심이 지극한 사람은, 그 마음은 결국 가족과 이웃과 나라와 만백성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음을 다잡아 마음을 다스리는 도리와 하늘을 모실 수 있는 가르침을 전봉준은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과 농민군 규합은 무관한 일이며 우금치에서 끝난 농민전쟁의 우두머리가 자기라고 주장하고, 충과 의로서 일으킨 봉기를 어찌 최시형과 의논해야만 하는가라고 도리어 꾸짖었다.

마음을 다하면 진심(盡心)이며 충심(忠心)으로 섬기는 사람이 된다. 무엇을 섬겨야 하는가. 누구를 섬길 줄 아는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의 끝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다.

동학농민전쟁의 연원(淵源)이 되는 <동경대전>의 맨 첫 마디를 수운 최제우는 이렇게 말씀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비와 이슬의 혜택(雨露之澤)을 알지 못하고 그냥 무위이화(無爲而化)로 여긴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한울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마냥 자연스런 이치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한사람이 스스로 생각기를 "내가 갓난아기로 태어나 이렇게 커서 어른이 된 것은 그렇고 그런 자연스런 일이다"고 태연히 여길 뿐 부모나 가족이 그를 보살피고, 이웃이나 나라가 그의 울타리가 되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그 소중한 관계망(網)을 업신여긴 생각이다.

나아가 이 모든 것, 사람과 짐승을 비롯하여 곡식과 수목, 물과 불, 비와 바람, 빛과 어둠을 나고 들게 하시는 뿌리, 곧 밑동을 잊고 사는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있어 세계가 있을 뿐이라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다석 가로되 "신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통하는 것, 곧 신통(神通)하는 것을 찾아가는 것이 과학입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더하고 빼고 쪼개고 태우고(加減乘除)하는 것을 자주 하다 보면 신통해집니다. 신통해지니까 자꾸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모든 것이 신통합니다. 죄다가 신비입니다."

다석은 또 무왕불복(無往不復), 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다는 수운의 깨우침에 대해 "다시 온다는 것은 불원지복(不遠之復)이라, 들려오는 뉴스가 거의 낙망케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머잖아 다시 돌아온다."고 하였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한 말세(末世)라 하더라도, 그런 뉴스가 마음을 어둡게 하더라도 머지않아 희망과 사랑의 메아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 임시재판소 판결문 제37호 판결 선언서: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 거주 피고 전봉준 41세. 피고의 행위를 대전회통 형전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서 관아에 변을 일으킨 자는 지체 없이 목을 벤다'는 법률에 비추어 사형에 처한다.

당시 세도가와 위정자의 시대정신은 동학혁명과 혁명의 지도자들을 당연하게 역모와 반란 괴수로 지목하여 저잣거리에 목매달았으나 그 무렵 한양성에 들른 영국 관광객 비숍 여사는 표현했다, 효수된 혁명지도자들, 얼굴마다, 서릿발이, 엄숙하고 잘생겼더라고.

효수된 수괴의 잘린 머리를 향해 침을 뱉는 그 날, 멀리 이상한 나라에서 온 여자 관광객 비숍은 혁명의 잘린 목을 일부러 보려고 온 듯 짧지만 찬란한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세상이 '아니다'고 할 때 '그렇다'고 하여 '무왕불복'의 이치는 이미 다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개의 밀알이 썩어 더 많은 밀알 새끼를 치느니라.' 시인은 또 예수의 말씀과 석가의 말씀과 공자의 말씀과 수운의 말씀과 전봉준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이들은 세상과 우주의 이치를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절대의 세계가 우리에게 내려준 '우로지택(雨露之澤)'의 은혜를 사모한 이들이다.

이러한 일들이 한울님을 모시고서, 사람도 한울님이라고 한 동학과 <금강>의 느낌과 표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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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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