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염되지 않으면 주류 끼지 못했던 시절
촛불힘 곰팡이 세상 접고 미래희망 기약

4년 전인 2014년 가을 나는 "극우주의라는 곰팡이"란 제목의 칼럼을 이 지면에 썼다. 당시 대표적인 극우 집단인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유가족들 코앞에서 폭식투쟁을 벌였고, 길 건너편에는 어버이연합이 확성기를 통해 연일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으며, 급기야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에 앞장섰던 폭력집단 서북청년단을 재건하겠다는 무리들까지 등장한 때였다. 한마디로 광기가 춤추는 세상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 시절 머물렀던 서울 홍제동의 반지하방의 곰팡이가 떠올랐다.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오자 방안 구석구석 퀴퀴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고, 벽지 여기저기에 얼룩이 생기며 곰팡이가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6월 말 장마가 시작되자 곰팡이는 통제 불능 상태로 창궐했다. 청소와 소독만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어서 7월 중순 즈음엔 그저 장마가 빨리 끝나기를, 태양이 잠깐이라도 얼굴을 내밀어 주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곰팡이가 장악한 세상에서 건강한 생명을 기대할 수 없다. 음식은 이내 상하고 물도 금방 오염된다. 피부에 달라붙으면 무좀과 염증이 생기고 기도를 타고 들어가면 호흡기 질환은 물론 시력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는 곰팡이에 오염된 세계가 배경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특수 호흡기를 착용하지 않으면 곰팡이 구역에 접근할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이명박 씨와 박근혜 씨가 대통령 하던 시대가 그랬다. 스스로 오염되지 않으면 주류 사회에 끼어들 수 없었다. 호흡기조차 장만하지 못한 사람들은 속절없이 벼랑 끝으로 밀려났다. 분노와 공포가 산처럼 쌓이고 혐오와 폭력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세월호 사건은 곰팡이가 지배하는 세상의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 세계에서는 가해자가 언제나 떳떳했고, 피해자는 움츠리며 눈치를 살펴야 했다. 돈이 힘이었고 폭력이 윤리였다.

다행히 우리는 촛불의 힘을 빌려 곰팡이 세상을 무너뜨렸다. 곰팡이 세상의 잔해가 여전히 우리 주변에 널려 있지만, 어둡고 습한 곳에 신선한 공기와 빛이 공급되면서 망가졌던 시스템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세력들이 재판을 받으며 속속 형이 확정되고 있고 '다스'로 대변되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의 부패 또한 거의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얼어붙었던 남북 관계도 빠른 속도로 평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5·18 특별법이 통과돼 발포 명령자를 조사할 길이 열렸고, 세월호 특조위 2기 또한 곧 출범할 예정이다.

더 깊고 근본적인 변화도 일어나고 있다. 곰팡이에 억눌려 숨죽이고 있던 생명이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겨우내 어두운 땅밑에서 두꺼운 외피를 두르고 숨죽이던 씨앗들이 봄을 맞아 일제히 싹을 틔우듯 지난 세월 억눌리고 희롱당하던 이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일제히 터져 나오고 있다.

서지현 검사가 8년 전 성폭력 사건을 폭로한 지 겨우 한 달여 지났지만 우리는 지금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살아가는 듯하다. 예전에도 같은 폭로가 적지 않았지만 반향의 정도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지금의 미투(me too) 운동은 작년 가을 미국에서 출발했지만 그 영향력과 이후 뒤따를 사회 변혁의 정도는 우리나라가 원조 국가를 크게 뛰어넘을지도 모르겠다. 트럼프와 네오콘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억눌린 씨앗을 틔워줄 신선한 공기와 따뜻한 햇볕이 이제 막 공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에선 너무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봇물이 터져 나와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선한 공기와 적당한 일조량이 확보된다면 자정 능력 또한 쉽게 자리 잡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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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적인 권력에 대항하는 약자들의 목소리 미투 운동은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모든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사회, 모두가 자기 존엄의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사회. 이제 막 움튼 씨앗이 자라나 미래를 기약하며 꽃을 피울 수 있는 사회, 새로운 백화제방의 시대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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