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 끝 마주한 설산 진풍경 힘든 마음이 눈 녹듯 사라져
거친 눈발에 체력 소모 극심
기온 탓에 휴대전화도 꺼져
사람들 "힘내세요"용기 줘
설경 보고 우려·원망 불식

어제의 호기는 어디로 갔을까. 걱정이 앞선다.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다. '겨울 설산은 덕유산'이라는 선배의 말에 무턱대고 오른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다. 도시의 기온은 점점 오르고 있지만, 산은 아직 하얀 겨울이다. 겨울을 보내는 비도 산에서는 함박눈이 돼 내린다.

거창 북상면 월성리 황점마을에서 황골계곡을 따라 삿갓재대피소에 닿았던 게 어제 일이다.

국립공원 누리집은 이 '삿갓재 코스'를 전체 편도 3.4㎞ 구간으로 2.5㎞ 구간까지 난이도 '보통'으로 소개하지만, 오랜만의 산행이어서 거친 숨이 터졌고 체력적 한계를 절실히 체감했다.

삿갓재대피소에서 이른 잠을 청하고 오전 6시께 눈을 뜨니 아직 밖은 컴컴한 어둠이다. 살갗에 물기가 닿는 것을 보니 눈이 오는 모양이다. 설산 경치가 목적인 산행이지만 덜컥 겁이 난다.

눈 덮인 겨울의 덕유산. 이 장관을 말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최환석 기자

아침 식사로 배를 채우고 풀었던 짐을 싼다. 겨울 산행은 저체온증을 주의해야 한다. 땀을 흘려 젖은 채로 걷다 보면 금방 옷이 얼어버린다. 두꺼운 외투 한 벌보다 여러 옷을 겹쳐 입고 자주 갈아입는 것이 좋다.

설산 산행은 아이젠(미끄러짐을 막는 등산 장비)이 필수다. 등산용 지팡이도 체력 부담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전날 올랐던 삿갓재 코스 이야기 하나 더. 약 1시간 30분 걸리는 짧은 구간이어서 당일치기 산행에도 알맞지만, 덕유산 최고봉인 향적봉이나 남덕유산까지 걸을 계획일 때도 훌륭한 선택지다. 삿갓재대피소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일찍 출발하면 부담 없겠다.

이날 걸을 구간은 삿갓재대피소에서 무룡산~동엽령~백암봉~중봉을 거쳐 향적봉까지다. 함양군 영각탐방지원센터에서 전북 무주군 구천동탐방지원센터까지 이어지는 '종주 코스' 일부다.

삿갓재대피소에서 향적봉까지, 편도 10.5㎞ 구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아래로 펼쳐진 장관에 숨이 탁 멎는다. 우려와 원망을 단번에 불식하는 경치다.

거센 눈발을 맞으며 얼마를 걸었을까. 머리카락이 겨울 설산에 동화했다. /최환석 기자

설산의 매력을 몸소 느끼며 오르락내리락 걷다 보니 어느새 무룡산이다. 고도 1492m 산은 거창군 북상면 산수리와 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사이에 자리한다. 옛 이름은 불영산. 부처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이름에서 지금은 '용이 춤추는 산'으로 불린다.

무룡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동엽령으로 향하는데 눈발이 거세진다. 한번 불기 시작한 바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기온이 낮아진 탓에 휴대전화도 꺼졌다. 어플로 걸음 수를 재는 일은 어려워졌다는 뜻이다. 만보기를 두고 온 게 아쉬울 따름이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꾹 눌러 쓰고 걸음을 재촉한다.

동엽령에 다다르자 칠연폭포 방향에서 오르는 이들이 합류한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향적봉까지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다. 앞서 걷다 지치면 뒷사람에게 길을 내어주는 일을 반복한다. 앞서 걷던 이를 따라잡으면 "힘내시라"고 말을 걸기도 한다.

백암봉 가는 길. 주변으로 1m가량 눈이 쌓여, 발 디딜 틈이 모자란 좁은 길에 오가는 발길이 더욱 잦아진다. 향적봉에서 오는 길인 듯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양보하는 미덕에 웃음꽃과 고맙다는 인사가 오간다.

백암봉을 지나 덕유평전과 향적봉이 보이는 조망점에 선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간간이 보이는 표석과 조망점이라는 '쉼표'가 더없이 힘이 된다.

겨울 덕유산 일품으로 꼽히는 상고대. /최환석 기자

지금부터는 향적봉까지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숨을 고르며 천천히 걷는다. 눈발의 기세도 한층 너그러워져 왔던 길을 되돌아 보거나 산 아래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는 여유도 부린다.

겨울 덕유산은 설경과 상고대(나무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 이른바 눈꽃)가 일품이다.

봄에는 철쭉과 진달래, 여름에는 원추리 군락이 화원을 이루기에 어느 계절에 들러도 만족스럽다. 설산을 만끽하려고 덕유산을 찾은 나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겠다.

점심때를 훌쩍 지난 오후 2시께 목적지인 향적봉에 다다른다. 향적봉대피소에서 늦은 점심을 치르고 숨을 고른다. 왔던 길을 되돌아서 송계삼거리 기점에서 송계사 계곡으로 하산할 일이 남았다.

겨울 설산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걸음을 걷는다. 산 아래에는 봄 기운이 고개를 들고 있을 듯하다.

이날 걸은 거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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