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루트 따라 떠나다] (1) 건축가 훈데르트바서
화가·환경운동가였던 삶, 영상·미술관서 만난 모습…자연 존중 정신도 엿보여
빈부·소외 없는 교통체계…허식 없는 사람들 부러워

1786년 만 37세였던 괴테는 잠행하듯 이탈리아로 그랜드투어를 떠났다. 장장 1년 6개월여의 시간이었다. 이 여행은 괴테의 인생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231년 후 조문환 작가는 그의 여정을 따라 떠나 '괴테루트'를 현지에서 기록했다. 고향인 하동에서 '시골 공무원'을 지낸 조 작가는 지난 2017년 악양면장을 끝으로 28년 공직생활을 마무리했다. 하동에서 살면서 전국의 지인들에게 이메일로 지역 소식을 전한 글을 엮어 <하동편지>를 출간한 바 있으며, 섬진강 기행을 녹인 에세이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평사리에서 일상을 기록한 사진 에세이 <평사리 일기> 등을 펴냈다.

여행을 한 달여 앞두고 배낭과 캐리어 겸용인 21인치 중국제 가방을 샀다. 가방을 미리 싸 봐야 빠진 것을 챙길 수 있다고 아내가 재촉했다. 무엇을 가져 갈 것인가의 고민보다는 무엇을 두고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여행 배낭이 작은 것은 남겨 두고 가라는 것이다. 결국 여행이란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자주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여행은 30년 가까이 내가 살아왔던 '생존'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존의 공간으로 나가기 위한 의도적 단절을 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누구나 나름대로의 환상을 가지게 된다. 내 여행의 베이스캠프가 될 비엔나에 대한 정보는 신문에서 봤던 8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선정된 것 정도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도 그에 못지않다고 하여 출장길에 그곳을 가 봤었지만 가히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해도 전혀 과하지 않았다.

인류의 문명이 얼마나 발전을 거듭하게 될지 모르지만 이 정도에서 머물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 이 정도의 도시에서 그냥 그대로 멈추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나흘 동안 비엔나를 돌고 돌아본 결과였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가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아닐 것이지만 역사의 숱한 수레바퀴 속에서 밟히고 밟는 과거를 거듭한 것은 우리나 그들이나 별 다름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지금과 같은 국가 체제, 도시 시스템, 사람들의 감정과 생활 양태를 이런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운도 어느 정도는 작동되지 않았을까? 과거, 더 먼 과거를 살았던 그들의 선조들의 분투와, 역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과, 오늘을 살아가는 민중들이 함께 만들어 낸 산물이리라.

비엔나 교통의 중심축 트램, 이 도시에서 교통 소외자는 없어 보인다.

비엔나를 한 단어로 말하라고 한다면 '공존'의 도시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보인다. 적절한 규제와 자율이 도시를 짜임새 있게 만들어 가고 사람들은 거기에 잘 어울려 가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을 지탱하고 엮고 있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교통 시스템인 것 같다. 거미줄처럼 짜 놓은 교통 체계는 빈자나 부자나 그 누구도 소외가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지하철, 근교 철도, 버스, 트램과 같은 대중교통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자전거는 실핏줄처럼 움직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이들의 오락 기구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스케이트보드나 외발자전거가 하나의 중요한 운송 축을 담당하는 것은 우습기도 하고 참 부럽기도 하다.

여기에다 곳곳에 시속 30킬로미터의 안내 간판이 있고 심지어 마리아힐퍼 거리(Mariahilfer Strabe)는 20킬로로 제한하는가 하면 어떤 구간은 아예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하였으니 차와 사람의 공존을 위한 이 도시의 노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거리에 홀로 앉아 커피를 시켜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청년들과 외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예순 정도의 아주머니가 우습기도 했지만 허식과 가식이 없는 이 도시 사람들이 부러울 뿐이었다. 어쩌겠는가 여행은 시샘 때문에 떠나는 것인 것을, 많이 시샘하고 돌아와야 본전을 뽑는 것인 것을, 시샘이 없는 곳에는 발전도 없는 것임을.

쿤스트하우스 빈에서 한나절을 보냈다. 20분짜리 기록 영상물을 숨죽여 연속으로 세 번이나 보았다. 그의 작품들 앞에서 물끄러미 앉아 있기도 했다. 울퉁불퉁한 미술관 나무 바닥을 발로 비벼 보기도 했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와 빌리지에서는 곡선으로 흐르는 화려한 원색들의 건물 외벽에 기대 보기도 했다. 영상 속에서 그는 나체인 상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작품에 몰입하는 모습도 봤다. 그의 소망대로 그는 뉴질랜드에 묻혔다. 관속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비싼 수의에 감싸지지도 않았다. 죽어 한 그루의 나무가 되고 열매가 되어 또 다른 삶을 살기는 바랐다.

보행자 중심의 마리아힐퍼 거리, 걷고 싶은 거리의 상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관한 책(100*HUNDERT WASSER) 한 권과 그의 그림으로 만든 엽서를 사서 두 아들에게 부쳤다. 그 외에는 그에 대하여 다른 것들은 아직 잘 모른다. 비엔나 시의 쓰레기 처리장을 그가 설계했고 몇 군데 직선이 없는 건물들을 원색적인 터치로 건축했다는 것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영상과 미술관에서 본 그는 오스트리아, 특히 비엔나의 정신으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연을 넘어서지도, 군림하지도, 이용하지도 않는 자연 존중의 정신이 이 도시 비엔나에 자리하게 한 장본인이 아닐까?

아니더라도 좋다. 아닐 수 있다. 여행자의 환상일 수 있으니. 아니길 더 바란다. 위대한 도시가 이런 건축가나 작가 한 사람의 혼으로 될 리 만무하니까. 그래서도 안 되니까. 하지만 작은 밑거름이 되었기를 기대해 본다. 한 사람의 역할이 비록 작은 것일 수 있지만 도시에 스며들 수 있는 충분한 기운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도시가 있다면 참 부러울 것이다. 위대한 정신이 깃든 도시로의 여행은 시샘 가득 찬 여행일 테니까.

훈데르트바서는 원색적인 터치와 곡선으로 유명하며 환경운동가이자 건축가였다. 훈데르트바서 빌리지와 쿤스트하우스 빈에서 그의 체취에 흠뻑 빠질 수 있다.

그에게 직선은 악마의 손길이었다. 자연과 신은 그런 직선을 허락하지 않았고 꾸미지도 않았다. 무수한 직선들 속에서 사람은 강퍅해지고 신의 경지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수많은 자전거 길과 자전거 바퀴들, 곡선으로 휘감아 도는 철로 위를 달리는 붉은 트램들, 빈숲에서 내려다본 곡선의 도나우 강과 운하, 그 속에 훈데르트바서가 살아 있어 보였다. 다시 또 비엔나에 온다면 나는 어김없이 쿤스트하우스 빈과 훈데르트바서하우스에 가서 그를 만날 것이다.

마리아힐퍼 거리는 참으로 걷고 싶은 거리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걷고 싶었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잘려 나가는 가로수들, 1년 내내 파헤쳐지고 덧씌우기를 하는 도로들, 간판에 간판에 또 간판에 덧붙여지는 간판들, 좁아지는 인도들, 넓어지는 차도들, 늘어나기만 하는 주차 공간들,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이런 거대한? 일들을 만들어 내는가? 우리는 과연 그런 보이지 않는 손이 있기라도 한가?

자, 이제 베이스캠프를 떠날 시간이다. 언제고 이곳에만 머물 수 없다.

/글·사진 시민기자 조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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