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예술대학 극작과. 스무 살이 쟁취한 가장 강력한 타이틀이었다. 선배들의 환영을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정문을 들어섰을 때의 기분을 잊지 못한다. 반강제적으로 담당 교수의 희곡전집을 사들고 그들의 제자가 됐다고 전율하던 시절.

대학에서 처음 배운 건 위계질서다. 학회는 이상하리만큼 경건하게 교수님을 받들어 모셨고, 선배와 마주치면 큰 소리로 인사해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극작과 05학번 000입니다.” 마치 군대 같았다. 때론 그게 글을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해 보였다. 당시 오태석 교수가 가르친 과목은 <연극의 이해>였다. 신입생의 첫 번째 미션은 세계적인 극작가의 희곡을 각색하는 것이었다. 21세기에 필요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위해 밤을 새워 준비했다. 한 번 퇴짜를 맞고 두 번째 공연에 칭찬을 받았다. 그가 이끄는 극단 <목화>의 공연을 보기 위해 국립극장을 찾기도 했다. 눈앞에서 구현되는 아름다운 언어들을 보며 연극이 영화나 방송보다 더 진실한 세계라 믿었다. 빨리 자라 그들의 세계에 끼이고 싶었다.

최근 같은 과 선배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봤다. 10여 년 전, 오태석 교수에게 성추행당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또 다른 사람의 ‘미투’가 이어졌다. 뒤늦게 동기에게 전화해 물었다. 혹시 알고 있었냐고. 쉬쉬했을 뿐, 흉흉한 소문이라 믿었던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교수님 옆에 여자를 앉히지 마라’는 무언의 연대가 있었다. 성추행하는 교수 옆에 남학생을 앉히는 것만이 힘없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방어였다.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 나 역시 소문을 들었지만 한쪽 귀로 흘렸던 건 아닐까. 설령 알았다고 해도 쓴소리 한마디라도 할 수 있었을까. 한국 연극계의 살아있는 전설, 극단 목화와 오태석. 그 명예와 권력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장의 예술이라는 아우라에 취해 이해하기 힘든 대본을 소화하려 애썼고 교수님의 말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을 존경이라 믿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많은 세월을 글 쓰며 살아온 작가, 그토록 동경하는 무대를 만드는 연출가니까. 이토록 순진한 믿음은 돌이켜보면 가해자에게 힘을 실어준 시간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그래도 된다고.

목소리가 닿지 않는 먼 곳의 독재자에게는 비난을 퍼붓기 쉽다. 어떤 말도 서슴없다. 하지만, 가까이 살아있는 권력자에 대해선 제대로 눈 떠 쳐다보기도 어렵다. 감시조차 힘들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성추행 피해자의 고백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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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중요한 건 ‘미투’ 이후다. 세상의 모든 가해자가 바라는 건 “대한민국이 그렇지 뭐”하고 냉소하는 것이다. 뜨겁게 달려들어야 한다. 죄책감이라도 털어놓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미투’가 산불처럼 번져 권력이 가진 아성을 무너뜨리길 빈다. 비단 연극계뿐인가. 힘없고 약한 사람을 향한 폭력은 사회 곳곳에 있다. 완장의 힘이 클수록 온화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권력자는 우리가 침묵하도록 길들일 것이다.

야만적인 사회에 길든 나에게 먼저 거울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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