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감조차 없던 이가 드러낸 진가
의외 영역에 솜씨 발휘해 모두 감탄

어느 화가가 있었다. 그이는 전공인 미술로서 별 성공을 못 한 듯했고 자신이 그렸다는 그림들은 그림에 소견이 없는 이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도 못했다. 이러니 자칭 내로라하는 이들이 모여드는 합정동 출판 골목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는 있어도 그냥 없어도 그만인,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곁불 쪼여가며 살면서도 오지랖은 넓고 없는 사람 마음만은 잘 알아 챙겨주는 벗이자 우군 노릇 하는 소위 삼천 식객을 거느렸던 맹상군을 자처하는 출판사 사장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그 자리마저도 간 곳이 없을 딱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내려 보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맹상군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닭 울음소리로 구해내었다는 식객처럼 그이의 존재감이 확연히 쓸모 있게 드러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느 날 그네들이 줄창치듯 모여 시대를 한숨 하던 반지하 방에 놓여 있던 차탁이 찌그러졌다. 당장 멋 부리기 좋아하던 그네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었으나 묵묵히 아지트를 지키고 있던 시간만큼 그네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고 한쪽 다리가 심하게 너덜거리는 모양이 자기들 신세처럼 여겨졌는지 모두 무슨 큰일이 난 것처럼 낙담들을 하고 있었다. 모두 중구난방으로 해결책을 내놓는데 강력본드로 붙여보자는 쪽과 모두의 기물이니 추렴해서 새로 장만하자는 쪽으로 갈렸다.

하지만 설왕설래일 뿐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한쪽 구석에 없는 듯이 웅크리고 있던 그이가 슬며시 나서서 차탁을 살펴본 뒤 "오늘은 연장이 없으니 신문지 깔고 차 마시고 내일 고쳐보지요"라고 말했다. 일동은 유감스럽게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이가 나서는 것을 본 적도 없거니와 책 꾸러미 나르기가 다반사인 출판사 식객을 하면서도 허리 아프다며 팔짱만 끼고 있던 것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데, 하다못해 '노가다' 경력도 없는 그가 설치미술과는 영 반대쪽 동양화가인 걸 아는데 그렇게 망가진 것을 고친다니 차마 체면에 당신이 할 수 있겠소라고 말은 못하였으나 표정은 역력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전날 모였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이가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서 조각칼로 못쓰기가 십상인 다리를 깎아내는데 수십 년 나무를 다룬 소목장 뺨치는 칼질을 해대는 모습은 신기 그 자체였다. 뿐인가! 못질 솜씨는 더욱 가관이었다. 못이 박히면 갈라지기 쉬운 재목인데도 부드럽게 망치질을 하니 금 하나 가지 않고 제대로 박혔다. 모두 대단하다고 칭찬 일색인데 그이가 한마디 했다. "힘으로 했으면 영 못쓸 뻔했소."

두 번째는 그로부터 한두 해는 훌쩍 지나 그날의 감동도 어렴풋해졌을 무렵이었다. 전어구이를 해서 한잔 하자고들 여남은 명이 모였는데 모두 먹는 데만 선수일 뿐 제대로 구워내는 이가 없었다. 생것이니 탔느니 서로 얼굴들이 숯불들이 되어 가는데 또 그이가 나서는 게 아닌가. "전어는 살이 부드러워 잘 구워야 해. 그러니 시장시러워도 좀 기다리쇼." 그이는 은박지도 깔지 않고 석쇠에 곧장 전어를 가지런히 올려놓더니 벌겋게 타는 숯불 위에서 연신 뒤집기를 반복했다. 모두 그이가 하는 짓이 굽기는커녕 성질 급한 놈 환장시킬 심보라며 심드렁해하며 전어는 틀렸으니 다른 술안주를 준비하자고 웅성거렸다. 그러나 평소의 굽는 시간보다 좀 더 걸려 그이가 내놓은 전어구이는 석쇠에 달라붙는 살점 하나 없이 생긴 그대로 접시에 놓이는 것이 아닌가! 모두 자신들의 미련스러움을 한탄하며 감탄사를 연발하는데 그이가 조만조만 한마디 했다. "생선구이를 할 때 자주 뒤집어 주어야 이쪽저쪽이 고루 익고 눌어붙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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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하 수상해서 이런저런 말들을 늘어놓게 된다. 한쪽이 타 버린 생선을 먹을 국민이 얼마나 될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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