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3) 통영 동피랑
천수답 같던 곳은 벽화마을로…입소문 타고 인기몰이
예전 골목 반 이상 사라지고 카페·버거가게들 즐비
원주민 "절반이 외지인…모임 안 나오는 경우 많아"

이 씨를 거짓말처럼 다시 만났다.

10년 전 그 골목에서 만났던 분이다. 그렇게 같은 골목에서 같은 분을 다시 만난 건 처음이다. 다들 돌아가시고, 이사 가고, 골목이 아예 없어지고 그랬다.

10년 전 그는 그냥 이 씨였고, 카메라 앞에 정면으로 서지 않았다. 10년 뒤 다시 만난 그는 '이양순'이었고, 정면에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변화는 스스로의 결정일까? 주변 때문일까?

"사흘돌이 테레비에 나오는데 뭐!"

그게 이유였다. 10년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개벽

이양순 할매는 통영 동피랑 꼭대기 집에 산다. 지금으로 치면 동포루 바로 아래다.

10년 전 70세였던 그는 기자를 응시하지 않고 푸념했었다.

동피랑 바리스타커피숍서 만난 바리스타 박부임(왼쪽) 씨와 10년만에 재회한 이양
순 씨./이일균 기자

"여기 집이 한 집처럼 보이지예? 전부 세 채요. 맨 안 집이 내 집이고, 다음이 친정 어무이 집, 그 다음이 올케 집이요. 전부 과부 할매 아이가…."

"할배들은 일찍 세상 베맀지. 아부지가 육십둘에, 남편이 오십넷에, 오빠는 마흔아홉에. 전부 다 술 마이 묵고 죽었지 뭐. 우리만 그런 기 아이다. 이 동네 집집마다 그렇다 마!"

할매 푸념은 그때 동피랑 모습을 닮았었다. 할매는 동피랑이라 하지 않고 '주전골'이라 했다.

"열네 살 때 이사와 50년을 살았소. 그땐 전부 초가집이었지. 태풍만 불먼 짚단을 얽어매고, 물건을 묶고 난리였지. 그때도 여 밑에 시장(중앙시장)에서 장사하고, 노가다 하고 그랬지. 그땐 세라도 나갔는데, 지금은 안 나가. 누가 이런데 올라와 살라카나?"

그렇게 10년 전 동피랑은 겹겹이 골목이었다. 산골짝 천수답 같았다. 골목 사이로 동피랑 언덕이 보이고, 초가지붕 대신에 낡은 '쓰레트집' 천지였다.

어라! 골목이 사라졌다. 10년 새 동피랑 중턱 동네를 관통하는 도로가 생겼다. /이일균 기자

그런 동네에 천지개벽할 일이 생겼다.

발단은 '벽화'였다. 어떻게 벽화 그릴 생각을 했을까? 벽화를 그린 게 어떻게 개벽을 불렀을까?

설명은 '동피랑 바리스타' 박부임(67) 씨가 했다. 이 씨 할매를 10년 만에 기자 앞에 나타나게 한 분이다. 그는 주전골 토박이다.

"10년쯤 됐지예. 그때부터 2년에 한 번씩 벽화를 그맀고, 지금이 다섯 번째니까. 처음에 푸른통영21 윤미숙 씨가 그림을 그리자 했지. 동네 한번 살려보자꼬. 거기 통하나. 처음 1~2년은 쫓겨나고 또 쫓겨나고 했지. 그라다가 몇몇이 허락을 했고, 그때 나도 그리라 안 캤나(웃음)."

윤미숙 씨가 누군가. 통영·거제환경운동연합 간사에 연대도 신재생에너지타운 조성 주역 아닌가. 그 이름 앞에 '동피랑 벽화의 산파' 수식어가 그렇게 붙었다. 운동은 탄력을 받았고, 2년 새 다시 그림을 그리면서 전국에서 화가들이 참여했다. 입소문에 언론을 타면서 동네는 '확' 달라졌다.

벽화 이야기, 동네 이야기는 좀 있다 하자.

이양순 할매한테도 동네처럼 그런 극적인 변화가 있었을까?

"사는 기 똑같지"

"변화? 있지. 어무이가 돌아가싰소 재작년에. 106세에…."

"나는 팔십이 됐고, 올케는 팔십넷이 됐지."

"그것밖에 없소. 무신 변화가 있으끼고. 사는 기 똑같지."

"동네에서는 형편 '핀' 사람도 있다카더마는 예?" 소리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걸 눌렀다. 이심전심. 집을 몇 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땅덩어리를 몇백 평 갖고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변화가 있을까.

동피랑 꼭대기, 10년 사이 생긴 '동포루' 바로 아래 할매 집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2006년 11월 20일 자 기사

그런데 독자들께서는 행여 동포루 가는 길에 이 집을 지나거든, 조용히 하셔야 한다. 이 씨 할매나 올케의 곤한 낮잠을 깨워서는 안 된다.

동피랑의 개벽처럼 극적인 변화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일부에 그쳤다. 그 일부에 대해서는 바리스타 할매가 쓴소리를 했다.

"윤 국장이 관리했을 때만 해도 확실했지. 3년 이상 실제로 거주 안 하면 가게를 못 열게 했거든. 그런데 윤 국장이 시청서 짤리삐고 나서는 큰길 위 마흔 집 중에서 외지인이 차지한 가게가 스무 개가 넘어요."

"어떤 사람은 서너 채를 사 갖고는 가게를 잇기도 하고, 세만 받고 안 사나. 동네 모임을 해도 본래 살던 사람 말고는 잘 안 나와. 그러니까 처음처럼 관리가 잘 안 되지."

그게 천지개벽의 끝인가?

그러고 보니 예전 골목은 반 이상 사라졌다. 폭이 10m 넘는 도로가 동네를 관통했다.

도로 양쪽으로 늘어선 커피숍과 카페들….

동피랑 먼당 쪽 남은 골목 안에도 가게는 즐비하다. ○○카페, ○○○커피숍, ○○그림가게, 가정집 철제 대문 앞에도 수제버거 안내판이 붙었다.

이제 동피랑은 실패한 마을사례로 평가된다. "마을은 개발됐는데 원주민 대부분은 자본에 밀려났다"는 이유다.

그속에서 밀려나지 않은 이양순 할매, 박부임 바리스타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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