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의 역기능, 정의감·비판의 눈 위축
도덕이 인정 이기려면 '냉정한 철퇴' 필요

인구 11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 밀양에 전국민 시선이 집중됐다. 세종병원 화재로 사망자가 계속 늘면서 밀양은 슬픔에 젖어 있지만, 사고 후 17일이 지난 지금은 빠른 시일 안에 참사가 진정되기를 바라는 염원이 이어지고 있다.

세종병원 화재 참사는 내게 인정(人情)의 두 얼굴을 보게 해줬다. 하나는 '어둠'이고 또 하나는 '희망'이다. 지난 8일 세종병원 이사장, 병원장, 총무과장 3명이 긴급 체포됐다. 이후 이사장과 총무과장은 구속됐고, 병원장은 불구속 입건됐다. 모두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다. 경찰은 불법 증축 문제, 안전·환자 관리 등 업무 소홀, 비상용 발전기 미가동, 불이 난 1층에 방화문이 없는 점과 사무장 병원 의혹까지 수사하고 있다.

현장 취재를 하면서 만난 밀양 시민들은 하나같이 세종병원 이사장의 욕심을 탓했다. 더불어 단속 요소로 보이는 문제들을 묵인해준 밀양지역 정서를 꼬집었다. 입바른 시민들은 혈연·지연·학연으로 연결된 깊고 진한 정(情) 때문에 부정부패가 근절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는 비단 밀양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 다리 건너면 모두 아는 사람인 '작은 도시'엔 전국 어디서나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고 김열규 교수는 <한국인 우리들은 누구인가>란 책에서 '정(情)의 역기능은 정의감과 비판적인 눈이 위축되는 것'이라고 했다. 강준만 교수는 '정상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일이 연고와 정실로 해결되는 것을 한국인은 부정부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한국인을 위한 교양사전>)고 진단했다. 많은 학자가 '한국인은 인정을 바탕으로 하는 관계지향적 문화를 갖고 있는데, 내가 특혜를 받으면 정(情)이고 다른 사람이 특혜를 누리면 부정부패로 여기는 이중적 사고 방식을 갖는다'고 분석하고 있다. 대부분 밀양시민이 '문재인 정부가 안전 매뉴얼과 시스템을 엄격히 바로잡는다고 해도 뿌리깊이 박힌 정(情)의 관행을 무너뜨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정(情)의 순기능을 동시에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정(情)은 가장 빨리 희망을 잉태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김열규 교수는 정(情)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매듭', '온기 서리고 감쌈이 있는 마음 바탕'으로 정의했다. 세종병원 화재 사망자를 애도하는 합동분향소에 1만 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가고, 피해자를 돕는 성금이 잇따라 3억 원이 넘어서는 모습이 그렇다.

이수경.jpg

하지만 나는 반문한다. 인정이 어둠을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을까. 한 취재원이 핵심을 찌르듯 쏟아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박정희 시대 때 경제만 성장시키다 보니 현재 한국의 도덕과 안전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다. 대형 참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어디서든 눈 감아 달라고 하고, 눈 감아 주려고 한다. 유착 관계가 보일 땐 내 부모라도 철퇴를 내려야 한다. 공무원이 잘못했을 때 규정이 너무 약하고 허술하다. 우리나라 법은 냉정해야 할 때 냉정하지 않고, 온화해야 할 때 온화하지 않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