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늘 엄격했던 사람, 시만 남기고 갔다
'그냥 받아들일 거예요'라던 시인, 병마 싸우다 50세 타계
최근 시집 발간 준비… "창원 대표할 문인 떠나 아쉬워"

지난 주말 경남 문단은 충격에 빠졌다. 느닷없이 박서영 시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진 까닭이다. 50세, 아직 세상을 뜨기엔 이른 나이였다.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이었다. 그래서 지역에서 시를 썼지만 전국적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동료 시인들은 그의 시가 근래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평했다.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다.

◇느닷없는 소식, 시인이 죽었다

"위급하다는 이런 소식을 듣긴 했는데, 그 뒤로 내색을 안 했기에 별문제 없는 것으로 알았어요."

"아프다는 건 알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될 줄을 몰랐어요. 충격에 어안이 벙벙하고 며칠 동안 계속 멍한 기분이네요."

"모두 공황 상태예요."

박 시인의 비보를 접한 동료 시인들의 말이다. 박 시인이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입원해서 치료 받거나 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시인 스스로 참 밝았다. 그래서 동료 문인들은 막연히 괜찮겠거니 하고 여겼었다. 하지만 박 시인은 오랜 암 투병으로 몸이 무너지고 있었다.

친한 지인들이 이 사실을 안 것은 2015년 초반이다. 박 시인은 2014년 12월 고양행주문학상을 받았다. 그러고 지인들에게 한턱 낸다며 모인 자리에서 아프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기 싫어했어요. 그런 사정을 아는 우리도 주변에 말을 안 했죠. 어쩌다가 약 잘 먹고 있느냐 묻곤 했는데, 워낙 몸이 약해서 그런지 약을 못 버텨내는 것 같았어요. 그러면서도 입버릇처럼 '저는 그냥 받아들일 거예요'라고 말했죠."

박 시인과 친분이 두터웠던 정이경 시인(경남문학관 사무국장)의 말이다.

지난 2014년 젊은 시인으로 소개될 당시 박서영 시인. /경남도민일보 DB

◇남들 모르게 힘든 시간이었다

몸이 아프면서 자연스레 문단에도 잘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외로운 시간이 길어졌다. 항암치료가 이어지며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가발을 썼다. 그런데 그 가발 쓴 모습까지도 참 예뻤다고 정 시인은 전했다.

박 시인은 무슨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언젠가부터 자주 하던 SNS도 없애고, 옷이며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2주 전 일이 급하게 돌아갔다. 어지러움을 호소한 시인을 가족들이 삼성창원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피가 모자라서 그런다며 수혈을 했다. 그런 과정에 갑자기 쇼크 증세가 왔다. 시인은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이미 몸 안에서 면역체계가 다 무너져 있었나 봐요. 말을 하지 못하게 돼서 가족하고 필담으로 대화를 했는데, 박 시인이 계속 집에 가고 싶다 그랬대요. 그렇게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저희한테 연락이 온 거였어요." 정 시인의 말이다.

그렇게 지인들이 위급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지난주 목요일, 금요일(1, 2일)이었다. 그런 중에도 박 시인의 몸은 서서히 기울었고 토요일인 3일 오후를 넘기지 못했다.

◇시를 아주 잘 쓰는 시인이었다

박 시인의 장례식장을 끝내 지킨 건 성선경 시인, 성윤석 시인, 송창우 시인 등 문·청 동인들이었다. 1991년 지역 시 문단에 활력을 불어넣자며 당시 젊은 시인들이 모여 만든 동인이다.

"1993년 즈음인가 박서영 시인이 저한테 와서 후배라고 인사를 하더라고요. 그때 문·청 동인 막내로 들어왔었죠. 굉장히 모던한 시들을 잘 쓰는 시인이었어요. 지금까지도 참 치열하게 글을 써 왔고요. 제가 생각할 때는 창원을 대표할 만한 시인이에요. 후배라서 칭찬보다는 질책을 주로 했었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시가 아주 좋아서 제가 칭찬을 했었어요."

성윤석 시인의 말이다.

박서영 시인은 참 지독하게 시에 매달린 시인이었다. 2013년 2월 18일 자 <경남신문> 인터뷰에서 시인이 한 말을 보자.

"시 잡지를 20개 정도 정기구독했다. 당시 월세 사는 형편에 아기를 돈 주고 맡기고 시 공부하러 다녔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듯이 시를 배우고 썼다. 자다가도 일어나 메모했고 벽에도 메모했다."

<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 (2006)

◇시에 온 생애를 걸었다

성윤석 시인은 박 시인이 너무나 시에 헌신하다가 자기를 돌보지 못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문협활동을 열심히 하거나 상을 받거나 하기보단 그저 자신에게 엄격했고, 시도 그렇게 썼다고 그는 회상한다.

박 시인과 함께 계간 <디카시> 편집위원인 김륭 시인은 그가 아주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나쁜 구석이란 게 없고 진실하고 정갈한 사람이었어요. 인간적으로 따지면 소박하고 그랬는데, 문학에 대한 열정은 아주 깊었고요. 편집위원 일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죠."

이런 시인이었기에 오히려 선배 문인들이 자극을 받곤 했다.

"후배지만 아주 자극이 되는 시인이었어요. 시에 온 생애를 다 건 것 같았거든요. 박 시인은 참 이렇게도 열심히 쓰는데 나는 배부르고 편하게 지내면서도 시를 안 쓰고 있다는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들었죠."

이런 박 시인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 문학 모임에 가도 지역 작가들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없는 편인데, 언젠가부터 경남에서 왔다 그러면 박 시인을 아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하더라고 문인들은 전했다.

< 좋은 구름 > (2014)

◇그리고 남은 시들이 있다

박 시인은 최근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유작이 된 시집 원고 2권 분량과 산문집 원고 1권 분량이 있다고 한다. 장례기간 문·청 동인을 중심으로 유족들과 발간 이야기가 오갔다고 한다. 유작 시들은 성윤석 시인이 맡아 정리할 예정이다.

절판된 시집을 복간하자는 제안도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까지 박 시인이 낸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 시작, 2006), <좋은 구름>(실천문학, 2014) 두 권 중 첫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가 절판된 상태다. 도서출판 걷는 사람 대표인 김성규 시인이 장례식장을 다녀가며 복간 의향을 전했다. 지난해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시인들의 시를 모은 <검은 시의 목록>이란 시집을 낸 곳이다.

지난 5일 오전 발인이 끝나고 박 시인의 유해는 창원시립상복공원 봉안당에 안치됐다.

박 시인의 명복을 빈다. 그의 시집 제목처럼 '좋은 구름'이 되어 떠났기를….


일몰 무렵이던가

아이를 지우고 집으로 가는 길

태양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갔다

그 후론 내 몸에 온통 물린 자국들이다

칸나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칸나 잎사귀 사이에 투명한 거미집

불룩한 배에 노란 줄무늬의

거미가 천천히 허공으로 빨려 들어간다

저, 불룩한 배를 터뜨리고 싶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물고 사라진다

거미는 무거운 배를 끌어안고 천천히

태양의 산부인과로 들어간다

집게로 끄집어낸 태아들이

여름 대낮 칸나로 피어난다

관 뚜껑이 열리듯 꽃이 피면

내 몸은 쫙쫙 찢어진 꽃잎이 된다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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