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햇살이 눈부시던 초여름 언저리였다. 한 아이가 쇼트커트 머리를 대충 빗어 넘기고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내리쬐는 태양을 등지고 거나한 걸음을 옮기던 한 사내가 위아래를 훑는다. 아이와 눈이 마주치자 한마디 툭 내뱉는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르겠네."

기다리던 버스가 도착하고 잠시 정차했다가 떠난다. 정류장을 휘감은 희뿌연 먼지 사이로 아이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미동도 않은 채 서 있다. 키가 작던 검은 그림자는 정류장에 세워진 표지판만큼 길게 뻗어지고 나서야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아이는 저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뜨거운 그 무언가를 삼켰다. 그때는 몰랐다. 자꾸만 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순간의 감정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수치스러움과 분노와 무력감이란 것을.

당시 13살 소녀는 훌쩍 자라 풋풋한 대학생이 되기도 했으며, 20대 아가씨 모습을 지니기도 했다. 아르바이트와 인턴 등을 지내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양~'이라고 부른 손님에게 커피를 타다 준 적도 있고, 술잔을 들이미는 상사에게 술을 따른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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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불쾌감이 솟구쳐 문제를 제기하면, 오히려 당돌하거나 예민한 여성으로 치부됐다.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사회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는 왠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느덧 소녀는 30대 후반이 되어, 전에 없던 '페미니즘 '을 말하고 있다. 사실 13살 소녀의 기억은 20여 년 전 기자가 겪었던 경험이다. 8년 만에 힘들었던 기억을 거슬러 피해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처럼 이제야 고백한다. "미투" 그리고 "위드 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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