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경 지음
자녀 체벌·과잉 통제 등 일그러진 가족주의 비판
적극적 정책 개입 강조

큰 잘못을 저지른 학생에게 교사가 엄하게 꾸짖고 경우에 따라 체벌을 한 후 훈육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면서 연고를 발라주는 장면. 아, 얼마나 감동적인가?

20~30년 전이라면. 그러나 현재 학교에서 체벌은 금지되었다. 때려서라도 학생들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사의 책임감 있는 행동이라 믿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심정적으로 그런 것을 기대하는 교사와 부모들이 있을 수 있다.

<이상한 정상가족>. 가정은 어떠한가? '친권'이라는 무한책임감에서 오는 이상한 권력이 있다.

내 아이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는 미명 아래 약자인 아이들에게 행해지는 폭력까지도 간섭하지 말라는 거부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2013년 칠곡의 아동학대 사망사건은 학교, 경찰, 지방자치단체, 아동보호 전문기관, 이웃 등 37명의 어른이 학대를 인지하고 있었지만 아이의 사망을 막지 못했다. 2016년 평택 아동학대 사건은 지역아동센터에서 학대를 의심해 경찰과 함께 집을 찾아갔지만 확실한 증거 없이 간섭하지 말라는 부모의 요구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런 끔찍한 사건의 저변에 깔린 인식은 훈육을 위해 부모가 자녀를 체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에서 체벌 찬성률과 살인율의 궤적이 같다고 밝혔다.

아이를 학대한 부모도 처음부터 그런 끔찍한 결과를 예상하거나 의도한 것은 아니다. 작은 폭력이 반복되면서 폭력의 빈도와 강도가 세진다.

가해자인 부모도, 피해자인 아이도 폭력을 내면화하면서 종국에는 비극이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 반성보다 공포만 일으킬 뿐이다."

국가가 필요해서 정의한 '정상가족'의 의미는 수시로 바뀐다. 과거에는 조부모, 부모, 부모의 형제, 그리고 자녀들이 어울려 사는 대가족이 정상가족이고 이상적인 가족형태였다.

< 이상한 정상가족 > 김희경 지음

산업화 이후 부모와 아들과 딸인 자녀로 구성되는 '핵가족'이 정상가족이었고, 인구증가율이 높던 시절에는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시절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에 허덕이는 지금은 자녀를 많이 낳는 사람이 애국자라는 식으로 홍보한다.

더불어 '정상가족'은 결혼으로 맺어진 부모와 그들에게서 나온 자녀로 한정하고 있다. 이혼이나 사별로 한 부모 가정이 되면 우리 사회에서는 '정상 가족'이 되지 못한다. 입양을 하는 경우도 그렇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가족도 정상(?)이 아니다. 책 제목 <이상한 정상가족>의 함의는 이런 부분이다.

아이는 약자다. 가정이 위태로울 때 아이는 보호받을 곳이 없다. 아동학대는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허술한 결과다.

친권이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는 것 이상이 될 수 없다. 부모의 폭력을 처벌할 때 방패막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부모라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폭력을 사용한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사회에서 폭력이 용인되는 곳은 없다.

284쪽, 동아시아 펴냄, 1만 5000원.

/이정수(블로그 '흙장난의 책 이야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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