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흐른다

'순사 온다' 공포 몰고 온 헌병경찰제

일제는 한일병합을 하기 직전인 1910년 6월 24일, 경찰권을 박탈했다. 경찰권을 빼앗은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조선에 시행했다. 헌병경찰제는 과연 어떤 제도일까?

조선총독 직속으로 치안을 총괄하는 경무총감부가 있다. 이 경무총감부의 수장을 경무총장이고, 경무총장은 조선주차헌병대 사령관이 겸임했다. 각 도에는 경무부를 두었는데, 도 경무부장 역시 헌병대장이 겸임했다. 이렇듯 헌병들이 사실상 모든 치안을 관장하는 방식이다. 그럼 기존 경찰은 어떻게 되는가? 기존 경찰들 가운데 간부급인 경시와 경부 등은 군대 계급인 '위관'이나 하사관 등을 겸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들도 군인이므로 헌병대 지휘를 따라야 했다.

기존 경찰서나 주재소에다 헌병분대, 헌병분견소, 헌병파출소 등이 설치돼 경찰조직을 장악했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계엄령이 내려져 군대가 치안을 장악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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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당시 학생들을 체포하는 헌병경찰.

문제는 헌병경찰의 광범위한 업무와 권한이다. 반일 조직 탄압·치안유지와 같은 기본적인 업무 외에도 민적(호적) 사무, 호구 조사, 임야 감시, 도로 부설 감독, 납세 독촉, 법령 보급, 묘지 단속, 위생 단속 등 그야말로 일상 전반에 대한 감독과 감시 권한이 주어졌다. 게다가 헌병대 산하의 경찰서장과 지역 헌병대장은 '범죄즉결례'라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즉결심판 권한으로 재판 없이 징역 3개월 이하, 벌금 100엔 이하의 처벌을 내릴 수 있었다.

게다가 1912년 일제는 대한제국 시기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태형(매질하는 형벌)'을 부활시켰다. 일제 태형 1대는 조선 곤장 수십 대와 맞먹을 정도로 위력이 강했다. 채찍은 소가죽으로 했으며, 끝에는 납 등 금속제 덩어리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태형 중 사망하는 경우가 많아, 일제는 사망자 처리규정을 별도로 만들 정도였다. 헌병경찰은 즉결심판 징역 1일·즉결심판 벌금 1엔을 '1태'로 산정해 태형을 부과할 수 있었다. 사소한 시비에도 즉결심판에 넘겨질 수 있었고, 즉결심판을 받으면 태형이 부과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민중들에게 헌병경찰은 공포 그 자체였다. 이때부터 '순사 온다'는 말이 퍼지기 시작했다.

저항의 거점 청년회, 야학, 종교

일제는 한일병합 직후 모든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박탈했다. 심지어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조차 해체해 버렸다. 게다가 언론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당시 경남에는 <경남일보>가 있었으나 1915년 887호를 끝으로 폐간됐다. 이렇게 집회·결사·언론이 사라진 1910년대 경남은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그러나 암흑 속에서도 사람들은 조용히 뭉치기 시작했다. 191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각 지역별로 청년회, 청년구락부, 청년수양회, 청년단 같은 단체들이 비밀리에 생겨났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부산, 마산, 진주, 의령, 밀양, 김해, 진영, 창원, 통영에 당시 비밀 청년단체가 결성됐다. 당시 결사의 자유가 박탈된 상태이므로 이들 청년단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동했는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야학과 강습회 활동, 노동자·농민 단체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청년단체에 이어 야학설립도 한 줄기 빛이었다. 일제강점기 초기 교육은 그야말로 기본적인 소양 외에 전문적인 내용도 가르칠 수 없었고, 교과과정은 총독부의 검수를 거쳐야 했다. 게다가 언제든 일제의 뜻에 따라 학교를 폐교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대한제국시기 수만 개가 설립된 사립학교들은 급격히 위축됐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지역 인사들은 야학을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항쟁의 초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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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기 태형집행 모습.

부산에서는 1908년 초량동립학교 내에 야학과를 설치했는데 학생이 50여 명에 이르렀다. 1909년에는 부산 영주동에 명진학교를 설립했다.

김해지역은 청년회를 주축으로 1910년대 야학이 몇 군데 설립됐다고 하지만 그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1912년 조직된 김해청년구락단이 일제의 탄압을 받은 후 김해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1919년에 '김해여자야학회'를 설립해 운영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경남 김해 청년회에서는 그 회 일부 사업으로 여자야학을 설립해 현재 생도가 백여 명에 달하고…(시대일보 1924년 9월 8일 자 기사)"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9년 이전에 다른 야학을 운영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산에서는 옥기환과 구성전이 1907년 마산노동야학을 설립했다. 마산노동야학은 암흑기인 1910년대에도 꿋꿋하게 버텨나갔다. 1914년 마산 창동에 교실 6개에 달하는 교사를 신축했는데 당시 1300원이 들었다고 한다. 마산노동야학은 조선어와 일본어, 한문을 가르쳤다.

1919년 당시 집계된 바에 따르면 경남지역(부산, 울산 포함) 야학은 20여 개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보다 훨씬 많은 수의 소규모 야학단이 경남 각지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파악된 1910년대 암흑기 당시 경남에 존재했던 야학은 다음과 같다.

마산노동야학(1907년. 옥기환, 구성전 등), 합천야학(1908년. 박기준, 임직순), 부산야학(1908년. 정기두, 김영규), 김해군 농민야학(1908년, 농무회), 김해군 농무야학(1908년), 웅천군 개통야학(1908년. 지역 유지들), 초계군 노동야학교(1908~9년께), 합천군 적중노동야학(1909년, 지역 유지들), 부산부 명진야학교(1909년. 고윤하, 조진우 등), 합천군 국문야학(1909년. 지역 유지들), 창녕군 중야학원(1910년. 김기우 등), 울산군 대창야학교(1910년. 이종림, 강두영), 창원부 노동야학(1910년. 문석윤), 창녕군 남지야학(1910년대), 초계군 노동야학교(1910년대), 진주군 장재리강습소(1910년대. 천주교 청년회), 진주 내성동 노동야학(1910년. 정상진), 진주 비봉동 노동야학, 마산부인야학(1911년. 교육부인회), 창원야학교(1913년. 창원청년회), 울산 신화리노동야학(1917년. 장연화, 강남기 등), 창원군 이동야학(1919년), 창원군 비봉야학(1919년), 창원군 덕산야학(1919년. 정홍이 등), 창원군 석리노동야학(1919년), 밀양노동야학(1919년. 밀양 청년회), 김해여자야학(1919년. 김해청년회)

청년회, 야학에 이어 암흑기 경남을 밝힌 또 다른 주체로 천도교(동학)가 있다. 민족종교인 천도교는 진주에 대교구를 두고 포교활동을 했다. 천도교 진주 대교구는 진주, 울산, 함양, 마산, 고성, 사천, 합천, 통영지역을 관할하며 전희순이 대교구장으로 활동했다. 천도교는 전국에 교리강습소를 700개나 설립하고 민족교육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진주 대교구에는 교리강습소가 거의 없었으며, 교인들 숫자도 7714명에 불과해 경북과 함께 가장 교세가 약한 곳이었다. 대교구가 있던 진주보다 울산, 삼천포, 고성지역 천교도인들이 항일민족의식이 강한 편이었다.

천도교 외에도 천주교나 개신교계도 학교나 야학을 설립했으나 항일의식보다는 계몽운동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암흑기인 1910년대 경남에서 표면적인 항일운동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1912년 7월 다이쇼 일왕이 즉위하자 일제는 학생을 동원해 기념시가행진을 열었다. 이때 마산에서 창신학교 학생들이 일본 기마경찰대와 충돌해 일본 경찰 일부를 자산천에 밀어 넣었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됐고, 1925년 고등과가 폐지되는 등 어려움이 잇따랐다.

임시정부의 생명줄 '백산상회' 설립

1910년대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기업이 등장한다. 바로 의령출신 독립운동가인 안희제 등이 설립한 백산상회다.

안희제는 1909년경 영남지역 유지 청년들이 결집한 항일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을 결성했으며, 1911년 북간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병찬, 신채호, 안창호 등과 함께 국권회복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이를 통해 안희제는 지속적인 독립운동 자금원과 국내외 독립운동가 소통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호를 따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가 정확히 언제 설립됐는지는 알 순 없지만 대략 1914년과 1915년 사이 설립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산상회는 쌀 등 곡물과 면포, 해산물 등을 취급하면서 한반도와 일본을 오가며 중개이익을 남겼다. 백산상회는 지역 유지들을 더 모아 1917년 합자회사로 변경했고, 1919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 개편했다. 이후 부동산 매매, 금전 대부업까지 사업영역을 확장했고, 경영경험을 살려 조선주조주식회사, 경남인쇄주식회사 설립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대구와 서울, 원산, 안동, 중국 봉천 등에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뒀다. 그러나 지점과 연락사무소는 사업보다는 독립운동가들과의 연계를 위해 설립한 것이 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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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신학교.

백산상회가 선택한 독립운동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백산상회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지점과 연락사무소를 통해 임시정부로 전달됐고,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국내로 들여왔다. 안희제는 백산상회를 운영하면서 막대한 자금을 거둬들였는데 당시 영남지역 유지들 사이에서는 "백산이 왔다 가는 집은 곳간이 텅 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광복 이후 백산상회 사장이었던 최준과 김구가 만나 장부를 대조하였다. 그 결과 안희제가 거둬들인 자금은 한 푼도 빠짐없이 임시정부에 전달된 것이 증명됐다. 백산상회와 안희제의 노력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초·중반 극심한 자금난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임시정부 운영비의 약 60%를 백산상회가 부담했다.

하지만 백산상회는 일제의 방해와 주주들의 분열로 1928년 1월 29일 해산했다. 안희제 선생은 이후 만주에서 활동을 하다 대종교 지도자들이 일거에 체포된 1942년 '임오교변'으로 일제에 고문을 받고 1943년 8월 3일 순국했다.

참고문헌

-「1920년대 경남지방 야학활동」, 최윤경, 1997

-「1905년-1912년 경남서부지역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 심인경, 2008

-「일제하 진주지역 천도교의 문화운동」, 김희주, 『동국사학』 55호, 2013

- 웹사이트 '우리역사넷', 국사편찬위원회

- <경남도민일보> 2004년 7월 31일 자, <마산창원 역사읽기>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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