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정국의 상황에서 제일 먼저 국가건설에 나선 세력은 좌파였다. 그들은 먼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만들고 곧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했다.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남조선 지역에는 145개의 건준지부가 결성되었다. 1945년 9월 6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소하기 위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를 운영할 중앙인민위원회를 선출하여 전국적으로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해방 후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거의 전국에 지방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은상, 광양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

광양은 일제 때부터 사회운동의 전통이 지속되어 좌익세가 강한 지역이었다. 광양건준은 경찰서를 접수하여 치안을 담당하면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우익의 경우 한국독립당의 이은상을 중심으로 결집했지만 좌익세력과는 큰 마찰이 발생하지 않았다. 광양은 전남지역에서 마지막까지 인민위원회가 활동한 지역이었다.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광양경찰서에서 풀려난 노산은 곧바로 오후에 광양경찰서 무덕전에서 열린 시국수습군민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우파들이 모인 이 회의를 노산이 주도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인 8월 16일에는 좌파가 주도한 모임도 있었다. 이 모임에서 광양자치위원회 구성을 협의하고 위원장 김완근, 부위원장 이은상, 정진무를 선출했다. 그러나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이은상의 승낙을 받기 위해 김기선, 박봉두, 이경호 3인의 임원들이 노산의 집을 방문하였더니 상임위원 24명 중에서 친일파 몇 명의 교체를 제안하고 몇 가지 수정제안을 한 뒤 쾌히 승낙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자치위원회는 건국준비위원회로 개칭을 하였으며 별도의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김완근은 당시에 70세의 고령이었지만 이미 일제하에서 조선공산당 1차 조직에도 가담하였으며 신간회, 광양청년회, 광양소작쟁의 등을 주도했기 때문에 수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분으로 지역에서 영향력이 컸다. 이은상은 개인적인 사정으로 일제 말에 서울에서 내려와 광양에서 은거하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지역민은 아니지만 전국적인 명망가였기 때문에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다음 날인 8월 17일 광양서국민학교 운동장에서 해방축하 군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해방 이후 광양에서 조선인이 주도한 첫 군중대회이며 수천 명의 군민이 참석했다. 이 대회는 자치위원회 임원을 승인받기 위한 집회이기도 했다. 노산은 대회에서 강연을 하였다. 교육장 출신인 이용학은 2002년 광양을 답사하러 간 시조시인 김교한에게 "그때, 단상에 올라서 눈물을 흘리며 친애하는 군민여러분을 외쳤을 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하였다. 대회가 끝난 후 참석한 시민들은 광양서교에서 시작하여 화신광장까지 시가행진을 하였다. 광양자치위원회에는 좌, 우익이 모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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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신문사 사장 재직시 김구선생과 함께한 모습.

불과 1개월 정도 활동하다가 9월 20일 전남인민위원회가 출범한 직후에 광양건준은 위원장의 발의로 광양인민위원회로 개편되는데 이 과정에서 우파 성향의 이은상, 김석주, 이달주, 정창욱이 탈퇴한다. 결국 보수인사들이 빠지고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최흥종 위원장, 전남인민위원회 박준규 위원장

<노산 이은상 선생>을 쓴 김봉천은 노산이 전남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돼 광주로 갔다고 하는데 전남건준의 임원 명단에는 노산이 없다. 창립할 때에는 박준규도 위원장이 아니었다.

전남 건국준비위원회는 국기열 등이 나서서 8월 17일 오전 11시에 수백 명이 참석하여 광주극장(현 무등극장 위치)에서 결성되었으며 위원장 최흥종, 부위원장 김시중, 강해석, 총무부장 국기열, 선전부장 최인식을 만장일치로 선출하였다. 좌, 우익이 모두 참여하였다. 최흥종 위원장은 광주YMCA를 창립한 기독교 장로이며 3·1운동 당시 광주를 대표하여 서울과 광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많은 광주시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보름 후인 9월 3일 열린 도민대회에서 조직을 개편하여 위원장 박준규, 부위원장 강석봉, 국기열, 김철 등이 선출되며 초기의 최흥종, 김시중, 강해석, 최인식 등은 빠졌다. 개편된 건준의 부서는 도 행정기구와 유사하게 바뀌었으며 보수적인 명망가 대신에 진보적인 인물이 등장하였다. 박준규 위원장은 광양 출신으로 일제 때 항일운동했던 독립투사이다. 해방 직전에는 호남은행에 근무하다가 신병으로 구례에 있는 친구 집에서 요양을 하고 있다가 해방과 함께 광주로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는 덕망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원로로서 46년 초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위원장이 되기도 했는데 이런 경력으로 인하여 미군정에 좌익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전남건준은 일본인 전남도지사에게서 행정권을 이양받고 제일 먼저 독립운동을 하던 사상범을 석방시켰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군단위, 면단위 건준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런데 한 달 만인 9월 20일 전남건준이 전남인민위원회로 바뀌는 개편대회를 대의원 100여 명이 참석하여 진행하면서 며칠 전 개편된 건준 임원 대부분을 재선출하였다. 인민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에 박준규가 선출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최흥종, 김시중, 최인식 등은 물러났다는 자료도 있으나 이미 2주 전에 건준 개편과정에서 빠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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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5일 광양군민회의.

한편, 1945년 9월 9일에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의 직접통치를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 1호에 의해 그동안 국내에서 치안과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건준과 인공은 모두 불인정되었다.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건준이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소집하여 급하게 선포한 인민공화국은 미국 뿐만 아니라 소련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결국 1948년 8월 15일 단독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남한에서는 3년 동안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지방에도 군정기구를 조직하였다. 전남에 최초로 시찰단 성격의 미군이 들어온 것은 1945년 9월 10일, 미군 제24군단 제6사단의 선발정찰대가 전남에 도착하여 건준, 인민위원회 등으로 불리던 자생적 위원회를 모두 강제 해체시켰으며 12월 말 미군이 목포에 진주하면서 모든 통제권을 미군정과 미군의 지지를 받는 세력의 손에 장악되었다. 실질적으로 전남에 도착한 점령군 단위부대는 10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였다. 초대 군정지사를 맡은 제20보병 연대장 펩크 대령은 10월 25일 일본인 지사와 경찰서장을 파면시키고 10월 27일 제주도를 포함한 도내 일원에 군정실시를 선포하고 최영욱을 한국인 지사로 발령했다. 얼마 후 미군정은 전남인민위원회의 명목상의 해산이 아닌 실질적인 무력화를 위해 대체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다. 그 일환으로 각계의 저명인사 10명으로 구성된 지사 고문회를 구성하였다. 고문회의 기능은 도내 각급 기관에 충원될 인사를 추천하는 일이었다. 임명된 고문에는 최흥종, 김시중, 박준규, 이은상, 김양수, 장용태, 강신태, 여철현, 김종필, 최종섭 등이었다.

미군정으로부터 호남신문 관리권받은 사장 박준규, 부사장 이은상

일제시대 1929년경, 광주에서는 일본인 가타오카(片岡議)가 일어 기관지 '광주신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총독부가 1941년 1도 1사 주의라는 명분으로 언론통폐합을 단행, 광주신보와 목포일보가 통합돼 새롭게 전남신보가 탄생하였다. 일본인 신문인 전남신보는 제호만 바뀌었을 뿐 시설과 진용은 광주신보 그대로였다. 일제의 꼭두각시 신문이었다. 해방이 되자 언론계에서도 친일 청산문제가 당면과제였다. 1945년 12월부터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민족반역자에 대한 자체조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에 미군정은 조기에 신속하게 귀속재산을 접수하고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하였으며 건준 세력이 중심이던 자치위원회는 배제하고 주로 친미 우익세력에게 관리권을 이양했다. 그러나 전남신보는 좌우를 아우르는 모양이었다. 전국적으로 각 정파나 사회단체들은 관리권을 이양받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노력하였다. 특히 미군정은 사유 귀속재산의 처리방식은 일정한 기준이나 원칙이 없고 매우 자의적이었다. 가장 보편적인 처리방식은 귀속재산을 조선인 사원이 접수하여 자주 관리로 발행하던 것을 미군정이 회수하여 다른 사람에게 이양하는 방식이었다. 부산일보, 전남신보, 중선일보 등이 이에 속한다. 1948년 현재 전국의 언론 관련 귀속사업체는 116개소 였는데 그 중에서 신문사는 서울의 매일신보, 경성일보, 광주의 전남신보, 동광일보를 포함하여 각 도마다 1개씩 9개소였다.

해방 후 전남지역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지방신문은 1945년 8월 31일 창간된 전남신보이다. 일제시대 전남신보의 유일한 한국인 기자였던 김남중은 해방되자 한국인 사원들을 규합하여 자치위원회를 만들고 같은 제호로 신문을 발간하고 있었다. 광주에서는 이 무렵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신들의 활동상황을 알리는 '건국특보', '건국신보'를 자체적으로 발간하다 중단한 바 있다. 건준은 김남중이 주간 겸 편집국장을 맡아서 한 달 정도 운영하던 전남신보를 인수해 건국준비 전남신보사 명의로 타블로이드판 2면에 국한문 병용신문을 발행하였다. 이는 건준의 핵심인사 중에 국기열, 최인식, 고광표 등 언론계 출신이 많아서 신문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이 당시 광주지역 신문사와 미군정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거듭되는 정간처분 등으로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5년 11월 19일 전남 미군정청 정보국장의 지시로 각 지방에 빠르게 연락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전남기자협회가 12월 7일 구성되었는데 고문에 최영욱(초대 전남도지사), 이은상, 이사에 이강진, 선미봉, 김희규, 강대훈, 김천욱, 간사 최인식 등이었다. 기자협회는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 정례 기자회견을 하면서 미군정청의 정책이나 소식을 지역민에게 알려 친미적 여론형성을 시도했다. 이 시기에 건준 계열로 넘어간 전남신보는 군정 당국에 의해 11월 24일부로 운영권을 임탁키로 쌍방의 법적 계약이 이루어졌다. 이어서 1945년 12월, 미 군정청으로부터 관리권을 얻은 이은상(李殷相)은 전남건준 위원장 박준규(朴準圭)를 앞세워 인수인계를 추진하여 사장 박준규, 부사장 이은상, 편집국장 최인식, 기획국장 김남중으로 개편하고 타블로이드판 국한문 신문으로 발행하였다. 광양 인민위원회를 탈퇴한 노산은 1945년 12월부터 광주에 있으면서 박준규 전남인민위원회 위원장과 함께 미군정청으로부터 관리권을 위임받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위와 전남 미군정청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박준규(인민당 전남도지부 위원장), 국기열(민전 전남도지부 부위원장) 등이 3월 1일 구속됨으로써 건준 및 인민위 관련인사들은 전남신보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박준규가 사장에서 물러나게 되면서 인민위원회에 관련되어 있던 편집국 이강진 차장도 그만두었고 편집국장 최인식도 기획국장으로 편집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때부터 전남신보는 친미적 성향으로 돌아섰다.

이은상 사장 취임 이후 친미적 성향으로 돌아선 호남신문

노산이 사장으로 있던 시기인 1946년 3월의 호남신문에는 미군정, 정당 관련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고 주로 지역 소식과 행사안내가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 노산은 미군정청의 고문을 맡고 있었다.전남건준의 선전부장이었던 최인식은 호남신문사에 편집국장으로 들어가서 노산과 함께 신문을 만들고 있었는데 1946년 8월 18일 미군정을 비판하는 기사로 호남신문이 법령 88호에 의거해 2개월간 정간처분을 당하자 지방지로서 언론자유의 한계를 느끼고 10월에 편집국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갔다.

박준규가 구속된 이후 부사장인 이은상이 중심이 되어 총자본 1천만 원의 주식회사 체제로 운영권을 사장 박준규에게서 넘겨받아 노산이 2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1946년 3월 16일에 전남신보를 호남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였다. 호남신문은 전남신보의 사옥과 윤전기 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노산은 사장이 된 지 4개월 만에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미 1946년 8월에 무기정간을 한번 당하였던 호남신문은 1947년 3월 31일 좌익옹호, 선동 및 삐라 살포혐의로 사장 및 각 국장 등 65명이 연행되어 25명은 석방되고 나머지는 구속되는 사건이 미 군정기에 발생하였다. 열흘 전인 3월 22일에 남조선 전역에서 총파업이 발생하였다. 석방된 노산은 신문의 쇄신을 추진하였다.

처음 사장이 되었을 때는 신문체제를 기존의 타블로이드판 2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47년 8월 15일 자부터는 제호를 한글로 사용하고 배대판 4면 등 쇄신을 단행하였다. 초대 편집국장은 김창선이었다. 해방될 때 전남도청 지방주임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창선은 미군정에서 관방주사(인사처장)로 임명되었다가 그만두고 호남신문사로 왔다. 신문사에서 이사까지 오른 김창선은 노산과 함께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한국독립당 광주시당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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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경찰서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 시국대책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위)과 호남신문 제호와 이은상, 김구의 사진(아래).

노산이 사장으로 있는 동안 호남신문은 1947년 8월 15일 자부터 우리나라 신문사상 처음으로 국한문 혼용의 가로쓰기를 도입했다는 신문사적 의미가 있다. 전남건준 위원장이었던 최흥종은 1948년 8월 정부수립 후에 사장 이은상, 편집국장 최인식이 운영하는 호남신문사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당시에 미군정 정보보고서에 의하면 광주지역의 3개 신문 중에서 호남신문은 정치성향이 좌익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발행 부수는 3만 부였다. 전국의 18개 주요 지방일간지 가운데 가장 많았다. 전국에서 가장 좋은 용지로 신문제작을 했다. 같은 광주에 있었던 광주민보는 5천 부에 불과했다. 동광신문의 전신이다. 이 신문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7월에 폐간되었다.

미군정의 언론정책은 점령정책의 목표인 남한을 반공의 교두보로 만들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언론의 자유는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좌익언론에 대해서는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귀속재산은 언론사의 자치위원회를 부정하고 친미세력에게 관리권을 이양함으로서 언론계에 친미세력을 확산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당시, 광주의 3개 신문을 보면 호남신문을 초창기 좌파 성향이었다가 몇 개월 되지 않아 친미 우익성향으로 변하였고 동광신문 역시 한민당 관련 인사들에게 운영권이 넘어가서 기관지 역할을 했고 광주신보 역시 우익인사들이 경영주체로 참여했다.

이은상, 한독당 전남도당 위원장, 건국실천원양성소 강사

호남신문의 이은상은 1946년 10월 12일 결성된 한독당 전남도당의 위원장이었고 동광신문의 고광표는 1945년 11월 초에 결성된 한민당 전남도당 부위원장, 광주지부 위원장이었다. 1947년 6월, 조선중보(광주신보의 전신)의 신순언 사장은 한독당 전남지부 초대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제2대 위원장을 맡았었다. 해방 직후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보수 우익의 정치적 성향이었다.

1946년 5월 8일 광주 대성초교에서 열린 이승만 귀국 강연회에서 이승만이 조선중보의 구독을 권유할 정도로 처음에는 한민당의 색채가 강했다. 다른 신문들도 모두 자기 나름의 정치적 색채를 띄고 있었다. 이승만이 광주에 도착한 날인 5월 7일에 겨우 창간호를 낸 조선중보의 구독을 권유한 이유는 호남신문 사장 이은상이 열렬한 한독당 계열이었기 때문에 조선중보를 한민당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의도였다고 한다.

노산은 1947년 3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여 건립한 건국실천원양성소(建國實踐員養成所)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했다. 건국실천원양성소는 우익진영이 전국 각지의 애국청년들을 건국일꾼으로 키운다는 명분을 내걸고 만든 교육기관이다. 양성소의 기별 교육 인원은 100명 내외였다. 교육 기간은 제1기가 2개월이었고, 제2기부터 마지막 교육을 받은 제9기까지는 1개월 단기과정이었다. 교육내용은 독립운동사·정치·경제·법률·헌법·역사·선전·민족문화·국민운동·철학·약소민족문제·농촌문제·협동조합·사회학·공산주의 비판·여성문제 등과 특별강의였다. 1948년 12월 제5기 수료생 명부에 따르면 명예소장 이승만, 소장 김구, 부소장 엄항섭, 이사장 장형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강사는 조소앙, 조완구, 신익희, 지청천, 양주동, 설의식, 안재홍, 정인보, 이은상 등 각계의 인사들이었다. 강의는 안호상이 민족이념, 양주동이 문예부흥운동, 이선근이 국민운동, 류재기는 민족경제와 협동조합, 이은상은 민족정신이라는 주제였다. 김구는 매주 월요일 오후에 와서 정신 강화를 하였다고 한다.

건국실천원양성소의 본부였던 원효사(용산 원효로에 위치)는 1948년 9월 홍익대학교가 인수하였다가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이후 해체되었다.

노산이 가입했던 한독당은 해방 전에도 임정 요인들의 핵심세력이었고 해방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구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있었다. 1945년 12월부터 반탁운동의 중심에 서서 주도권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미소공위 불참, 미소 양군 조기철병 주장, UN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 실시지지, 단선단정 반대,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등을 주장하다가 급기야 단독선거 불참으로 인하여 현실적인 정치력이 크게 위축되었고 계속해서 남북회담의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통일국가 수립운동을 하다가 1949년 6월 김구가 암살된 이후 해체되었다. 이때는 노산이 호남신문사를 그만두고 서울에 와 있을 때였다. 1947년 5월에 열린 한독당 제6기 전당대표대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국내외에 370여 (지)당부가 있었으며 그중에서 전남지역의 당원이 꽤 많았으며 도내에는 17개 지부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이고 부위원장은 조소앙이었으며 일제시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노산과 함께 징역을 산 안재홍, 일제시대 신흥무관학교 교관이었던 오광선 등이 핵심 간부였다.

여순반란사건과 한독당계열의 오동기, 송욱, 이은상

1948년에 전개된 군부 내의 숙군작업은 좌파를 주 대상으로 하면서도 단독정부, 단독선거 반대세력을 겨냥한 폭넓은 것이었다. 10월 21일, 이범석 국무총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는 책동" 이며 국군 내의 "주모자는 여수 연대장이었던 오동기(吳東起)"이고 "국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했다고 발표했다. 다음 날인 10월 22일, 이범석 총리는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 고 언급하며, 이 반란 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이범석, 김태선 등이 김구를 극우파로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김구는 극우정객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근거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김구는 10월 27일 여순사건 진압 직후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나는 극우분자가 금번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며 관련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김구의 반박 보도문은 조선일보와 한성일보를 통해 보도되었다. 여수의 14연대장인 오동기가 체포된 것도 김구를 지지하는 한독당 계열의 군대 프랙션을 제거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제주도 파병을 위해 1개 대대를 편성하라는 작전명령이 내려진 뒤 10월 초에 체포된 연대장 오동기는 김구를 따르는 한국독립당 계열의 우익 인물이었고 반공주의자여서 남로당 세포와는 이념적으로 공유되는 바가 없었지만 오동기 체포 이후 숙군바람은 14연대 남로당 세포에게도 미쳤다.은 지역에서 명망 있고 존경받는 여수여자중학교 교장이었다. 그런데 이범석 국무총리의 국회연설과 정일권 육군 작전참모부장의 발표에 의해 여순사건의 민간인 총지휘자로 지목되었다. 송욱 교장은 해명하기 위해 제5연대 김종원 대위를 찾아갔다가 곧바로 체포되었다. 잔인한 김종원에게 체포된 송욱이 광주호텔에 감금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인들은 호남신문사 사장인 노산 이은상에게 구명을 부탁했다. 당시 이은상은 한국독립당 전남지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송욱은 여수일보 사장 정재완, 14연대장 오동기와 친하게 지냈다. 송욱이 가깝게 지낸 정재완과 오동기, 이은상은 모두 한독당 계열이었다.구명을 부탁받은 이은상은 한숨만 쉬다가 '나는 송 교장이 거기에 있다는 것은 듣고 있다. 그러나 지금 나도 송 교장의 구명운동을 나서고 어쩌고 할 처지가 아니다. 그리고 구명운동을 한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은상도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광주 5연대로 연행되었다. 봉기를 주도한 김지회의 신원보증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은상은 당시 4연대장 이한림 소령의 해명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이은상은 정부가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김구와 한독당 세력의 정치생명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송욱 교장의 구명에 나서달라는 말을 듣고도 "송 교장의 운명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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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 <청야> 포스터.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호남신문, 광주신보, 동광신보는 종군기자단을 편성했으며 중앙지들도 종군기자단의 기사를 게재하는 등 활약이 컸다. 이 과정에서 호남신문이 오보한 여순사건 주모자 중의 한사람인 김지회의 체포기사가 국내는 물론 AP, UPI, 로이터 등에 전재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6·25전쟁으로 북한군이 7월 23일 광주로 진입했을 때 광주의 3개 신문사 기자들은 23일까지 신문을 발간하고 광주 인근에 은신해 있었다. 그러다가 인민군 수색에 걸려 호남신문과 충장로 1가에서 발행되던 노동신문이 인민일보의 제작에 본의 아니게 협조하게 되는 일도 있었다.

여순사건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난 이은상의 서울, 부산 생활

노산은 호남신문사 초창기에 사설을 직접 쓰고 충무공일대기도 출판할 정도로 열심히 활동하다가 1948년 10월부터 여순사건 주모자의 김지회의 신원보증문제로 물러나고 서울로 갔다. 김봉천은 <노산 이은상 선생>에서 호남신문사가 정상궤도에 들어설 즈음인 1948년 10월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상궤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노산은 1949년 4월부터 1년간 동국대학교 문과대학 강사로 근무하였다. 이 대학에서 시조시인 조운이 1947년 고향인 영광에서 서울로 와서 동국대학에서 시조론, 시조사 등을 강의하다가 1949년 월북하였는데 연이어서 노산이 강의를 하였다. 노산이 광주를 떠나서 서울에 간 시점은 단독정부가 출범하던 시기였다. 먼저 서울에 올라와서 조선일보 편집국장, 1949년 1월 4일부터 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을 하고 있던 최인식은 1950년 5월 15일 언론사를 사임하고 이은상, 이한상 형제와 함께 사업을 하다가 6·25를 맞아 폐업했다고 한다.

노산은 1년간 서울에 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인 1951년 1월부터 1년간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6·25전쟁 중인 1951년 한형석과 부산지역 예술인들이 나서서 부산향토문화연구회가 경상남도 후원으로 감독 전창근, 배우 이택근, 최지희가 출연하여 만든 기록영화 <낙동강>의 삽입곡은 이은상 작사, 윤이상(부산사범학교 교사) 작곡이었다. 당시 경상남도 문화계장이었던 서양화가 우신출이 진행과 기획을 담당하였다. 1952년 2월 부민관에서 개봉했다. 꽤 오랫동안 노래 <낙동강>을 모르면 경남도민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많이 부르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금지곡이었다. 낙동강의 가사는 '보아라 가야 신라 빛나는 역사 / 흐른 듯 잠겨있는 기나긴 강물 / 잊지 마라 예서 자란 사나이들아 / 이 강물 네 혈관에 피가 된 줄을…' 영화 <낙동강>을 만든 향토문화연구회는 한형석을 비롯해 화가 우신출, 사진작가 김재문, 시조시인 이은상, 음악가 윤이상, 금수현 등이 만든 단체이다.

6·25전쟁 중에 부산에서는 대통령 재선을 위해 직접 선거제를 내용으로 하는 첫 번째 헌법개헌이 추진되었는데 발췌개헌안은 처음 표결한 1952년 1월 18일에는 찬성 14, 반대 143,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다시 1952년 7월 4일 밤, 일어서서 찬성을 나타내는 기립 공개투표로 찬성 163,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헌병대가 50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연행하여 국회의사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뒤 기습 표결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다. 1952년 7월 7일 정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개정헌법이 공포되고 8월 5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방식은 최다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죽산 조봉암이 이승만에 맞서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어느 날 부산에 있는 조봉암 자택에 여러 명이 모여서 선거준비를 하는 자리였는데 박기출, 강원룡, 이은상 등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조봉암은 강원룡에게 선거사무장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강원룡은 맡지 않았다. 대신에 청곡 윤길중이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조봉암은 "정치적으로 이승만은 어른이고 조봉암은 어린아이다. 정치적으로는 내가 이승만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고 하였다. 결국 조봉암은 이승만 대통령을 견제할 목적으로 출마하였던 것이다. 이 선거를 준비하는 자리에 노산이 어떤 연유로 참석하였을까? 후보는 현직 대통령인 이승만을 비롯해 무소속의 조봉암, 이시영, 신흥우 등 4명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선제 투표에서 이승만은 74.6%, 조봉암은 11.4%의 득표율이었다. 죽산은 초대 농림부 장관이 되었을 때에도 여해(如海) 강원룡 목사에게 국장직을 제안하였는데 그때도 사양한 적이 있었다. 

6·25전쟁이 끝난 후 호남신문의 재건을 위한 노력

6·25전쟁이 끝나고 수복 후 광주에서 맨 처음 발행된 신문은 광주신보였다. 손수겸이 10월 1일 자로 속간 호를 냈다. 다음으로 전남일보가 발간되었는데 이 신문은 훗날 김남중이 발행한 전남일보와는 전혀 다른 전남도의 기관지로 판권 없이 발행되었다. 전남일보는 호남신문의 속간이 늦어지자 1950년 10월 7일에 전남시국수습협의회 선전부가 귀속재산인 호남신문 사옥을 인수해 창간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호남신문, 광주신보, 동광신문 등 3사 체제였던 광주지역 언론계는 6·25전쟁 시기에 동광신문이 자연 소멸되고 이제는 광주신보와 전남일보의 양립 체제 속에서 광주신보가 위세를 떨쳤다. 광주신보는 새로운 엘리트를 규합, 총력을 기울임으로써 전남도 기관지 전남일보는 선전까지 맡아 역부족이었다. 이에 전남일보도 1951년 봄, 진용을 강화해 전남일보와 전 호남신문, 전 동광신문 등 3사 간부가 모여 발행인 고광표, 주필 김남중, 편집국장 한규종(韓圭鍾), 편집부국장 고문석(高文錫) 서두성(徐斗成) 등으로 진용을 재편했다.

그러나 1952년 6월에 다시 광주로 복귀한 이은상이 전라남도를 상대로 사옥명도소송을 제기하고 호남신문 사원들을 규합해 사내가 동요했다. 1951년 호남신문 사원들이 통행금지 시간에 전남일보 사옥을 강점하여 호남신문 속간 호를 발행했다. 이리하여 사옥 명도소송에서 호남신문이 승소하자 도 기관지로서의 전남일보는 1951년 12월 1일부로 정간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에 김남중 주필이 이은상에게 호남신문의 사옥과 시설을 넘겨주고 나와 부산 임시정부로부터 전남일보의 판권을 허가받아 1952년 2월 10일부터 민간지로 다시 태어났다. 이 신문이 바로 광주일보의 전신이다. 도지사가 주도하는 전남대학교 설립과정에 노산이 함께 참여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호남신문이 아직 敵産의 성격을 완전히 벗지 못해 경영권이 정부 당국의 입김에 의해 좌우되었다. 1954년 2월이었다. 자유당 정부는 원내 자유당(이기붕계)과 원외 자유당(이범석계)으로 나뉘어 당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였는데 이은상은 이범석 계열로 지목되어 호남신문의 경영권을 빼앗겼다. 노산이 김구 생존 시에는 한독당이었다가 6·25전쟁 직후부터 자유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실과의 타협일 수도 있고 북진통일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결국 호남신문은 자유당 국회의원이던 김철주에게로 넘어갔다. 사장이 바뀌면서 최인식도 편집국장에서 물러났다. 몇 년이 지난 뒤, 4·19이후 최인식이 부사장으로 취임하여 다시 재건 작업을 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961년 4월 16일부터 8일간 자진 휴간에 들어갔다가 결국 1962년 경매에 넘겨졌고 전남일보 김남중이 낙찰받음으로서 호남신문은 만 17년 만에 8월 31일 자, 지령 4783호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산은 호남신문 사장으로 있으면서 전남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먼저 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기성회는 재단설립위원회로 바뀌었고 위원장은 당시 전남도지사였으며 노산은 이사로 참여하였다. 드디어 1952년 10월 16일 문교부장관은 전남대학교 후원재단을 공식 인가하였고 1953년 4월부터 초대 재단이사장에 노산이 취임하여 1955년 3월까지 재임하였다.

해방 직후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가한 노산의 선후배들

해방 직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노력한 사람 중에는 노산과 친한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조선어학회 활동으로 노산과 징역을 같이 산 이극로와 조윤제다. 조윤제는 1960년대 이은상과 함께 청구대학에서 같이 근무했다.

이극로는 좌우대립을 극복하고 국론통일을 하기 위해 1945년 9월 7일 결성한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헌법연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 위원장, 1946년 2월 15일에 결성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에 선출되었고 1946년 10월에는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 김규식이 주석인 좌우합작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이때 강원룡, 이선근도 함께 참여하였다. 좌우합작운동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미소공위를 성공시키기 위해 9개 정당과 단체가 모여 1947년 2월 2일 민주주의 독립전선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극로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어서 8개월 후인 12월 20일에는 기존의 미소공위대책협의회, 민주주의독립전선, 시국대책협의회, 좌우합작위원회가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14개 정당과 5개 단체대표가 모여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의장 김규식, 부의장단에 이극로가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19일부터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와의 연석회의에 초청받았고 이 연석회의를 지지하는 문화계의 성명서에는 정인승, 이병기도 서명하였다. 이 연석회의에 참석한 이극로는 채택된 <3천만 동포에게 호소>하는 격문을 낭독하였다. 이때 도남 조윤제도 김구, 조소앙을 따라 평양에 가서 북쪽의 실정과 김일성 대학을 시찰하였다.일본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양주동도 참여하였다. 건준 내의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집을 위해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송진우를 수석총무(당수)로 선출하고 각 부서위원들을 선임하였는데 양주동과 현제명은 문교부에 소속되었다. 1945년 8월 16일 김성규 위원장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동회(大同會)에 정인보, 양주동이 참여하였다. 대한민국건국회의 전신인 청우회의 초대회장이었던 오광선은 1946년 4월 한국독립당의 국방분과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5년 11월 임시정부가 환국할 당시에는 한국광복군 국내지대 지대장이었다. 일제시대인 1931년,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을 출판하기 위한 작업에 노산과 함께 참여했던 유각경은 해방 직후 한국애국부인회의 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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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경찰서 내에는 경찰들이 모여 유도와 검도를 연마하는 도장인 무덕전(武德殿)이 있었고 회원증을 발급했는데 대일본 무덕회원증이라고 적혀있다 (심정섭, <일제의 순사들>, 도서출판 예원(2014년), 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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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양시민신문 2013. 2.19자에는 10월 10일이라고 하고 dictionary.sensagent.com/최인식에는 9월 20일이라고 하는데 중앙인민위원회가 9월 6일 출범했음을 볼 때 9월 20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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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환, <한국언론사>, 사회비평사(1997년), 347쪽

- 김남중, 해방이 되자 전남신보의 한국인 직원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하기 위해 모였다. 이제 우리 손으로 신문을 만들자고 결정하고 김남중에게 신문 발행의 총책임을 맡겼다. 김남중의 나이 29세였다. 그는 사장이라는 호칭이 쑥스러워 스스로 주간으로 낮춰 불렀다고 한다"(광주일보 남봉기념사업회, 1988년), 나중에 광주일보 회장을 역임했다

- 김민환, <한국언론사>, 사회비평사(1997년), 348쪽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96쪽(광주민보 1945년 12월 9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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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89쪽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89쪽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98쪽

- 김석준은 이때 무기정간을 당하였다고 한다(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이화여대 출판부(1996년), 420, 422, 455쪽)

- 국립중앙도서관, 신문해제(www.nl.go.kr/newspaper)에서는 1946년 11월 24일에 운영권을 박준규로부터 노산이 넘겨받았다고 하는 한편 김봉천의 <노산 이은상 선생> 64쪽에는 1946년 3월에 사장으로 취임하였다고 한다

- 호남신문 사고(1946년 3월 13일 자)에 의하면 제호 변경은 1946년 3월 16일이다(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79쪽)

- 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이화여대 출판부(1996년), 420, 422, 455쪽

- 김창선은 1952년 5월 10일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른 초대 전남도의회 의원선거에 자유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도의원에 최다 득표로 당선되어 초대 의장을 역임하였다

- 해방 후 문교부 편수국장인 외솔 최현배는 오로지 한글로만 가로쓰기를 주장하였다(김석득, <참 삶의 길을 열어준 외솔 최현배 선생>, 스승, 도서출판 논형(2008년), 122쪽)

- 위키피디아, 위키백과

- 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이화여대 출판부(1996년), 419쪽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83쪽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92쪽

- 고강표, 담양 창평의 대지주, 동아일보 고재욱, 고재필과 사돈지간. 김성수, 송진우와 일본에서 같이 공부했음. 건준 초대 재무부장, 조선중보에 참여하기도 했고 동광신문을 인수하기도 했다

- 유종원, 김송희, <미군정기 지역언론 특성에 관한 연구>, 언론과학연구 제5권 2호(2005년), 291쪽(김석학, 임종명, <광복30년 건국편 광주>, 전남일보사(1975년))

- 건국실천원양성소에 참여한 강사는 다음과 같다. 조소앙(趙素昻, 독립신문 사장), 조완구(趙琬九, 한독당 중앙위원), 신익희(申翼熙, 자유신문 사장), 지청천(池靑天, 대동청년단 단장), 나재하(羅在夏, 철도학교 교장), 김성주(金成柱, 청년운동가), 김경수(金敬洙), 최호진(崔虎鎭), 김정실(金正實, 단국대 학장), 양주동(梁柱東, 국어학자), 민영규(閔泳珪, 교수), 엄상섭(嚴詳燮, 검찰청 차장), 엄항섭(嚴恒燮, 양성소 부소장), 김학규(金學奎, 한독당 최고위원), 설의식(薛義植, 새한민보 사장), 김기석(金基錫), 이상조(李相助, 법대 교수), 주석균(朱碩均, 농림부 차관), 홍병선(洪秉璇), 김하선(金昰善, 독립운동가), 김석길(金錫吉, 양성소 상무이사), 안재홍(安在鴻, 한성일보 사장), 정인보(鄭寅普, 국학대학장), 황기성(黃基成), 이인(李仁, 정치인), 김활란(金活蘭, 이화여대 총장), 김법린(金法麟, 불교총무원장), 박순천(朴順天, 부인일보 사장), 이은상(李殷相, 민족문화협회장)

- 노경채, <한국독립당연구>, 도서출판 신서원(1996년), 146쪽

- 조소앙, 1887~1958년, 1930년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함께 3당 통합으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으로서 국가건설 방향으로 삼균주의를 정립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김구와 더불어 한독당의 양대 세력이었다. 노산은 1965년 1월 조소앙 선생 문고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김복근 외, <가고파, 내 고향 남쪽바다>, 경남시조시인협회, 도서출판 경남(2017년), 302쪽)

- 오광선, 1963~1965년까지 청우회 초대회장을 지냈음. 노산은 2대 회장 역임

- 서울신문 1948년 10월 22일 자

- 서울신문 1948년 10월 24일 자

- 한성일보 1948년 10월 28일 자

- 프랙션(Fraction), 정당이 대중단체의 내부에 조직하는 당원조직을 가리킴

- 김득중,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2009년), 442쪽

- 김득중,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2009년), 72쪽

- 한편 1948년 10월 송욱송욱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상명여학교에 복직하였다가 1945년 고향에 처음으로 설립된 영산포여중 교장으로 초빙되었고 1946년 광주서중 교감을 거쳐 여수여중 교장으로 재직했다(김득중,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2009년), 330쪽)

- 김득중,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2009년), 330쪽

- 김종원은 여순사건 진압 후 이승만의 총애를 받아 한국전쟁 당시 계엄사령부 민사부장, 헌병부사령관,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등을 엮임했다. 거창학살사건 조사 방해 혐의로 징역형을 언도 받고 군에서 예편한 후 전북경찰국장, 전남경찰국장을 거쳐 1956년 5·15대통령선거를 마친 후 부정선거의 공을 인정받아 경찰의 최고직인 치안국장(1956.5~1957.3)을 하였고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세계일보 1948년 11월 9일 자, 반충남, <여수 14연대 반란과 송욱 교장>, 월간 말(1993년 6월호), 220쪽)

- 김계유, <1948년 여순봉기>, 역사비평(1991년 겨울호), 291~292쪽

- 반충남, <여수 14연대 반란과 송욱 교장>, 월간 말(1993년 6월호), 220쪽(김득중, <여순사건과 반공국가의 형성>, 선인(2009년), 333~3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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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석, <한국언론사>, 도서출판 나남(1990년), 431쪽

- 노산의 형제는 그가 출생하기 전에 형이 사망하여 그가 장남이 되었으며 2남 이순상, 3남 이한상은 서울대 교수, 4남 이길상은 저명한 물리학자, 연세대 교수, 5남 이정상은 배재출신으로 일제 때 순교하였고 누이동생 희(喜)가 있었다

- dictionary.sensagent.com/최인식

- <신태범의 부산문화야사 39, 음악거장 윤이상>, 국제신문 2001년 2월 15일 자

- <주경업이 만난 부산을 지키는 꾼, 쟁이들 39, 구포향토사 연구가 백이성>, 국제신문 2013년 10월 27일 자

- 1910~1996년, 동래 출신, 상해 신화예술대 졸업,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압록강행진곡 등 수많은 독립군가와 서정가곡을 짓고 한국 최초 오페라 아리랑(1940년)을 발표, 부산 최초 국립극장인 문화극장(1950년)을 세움. 부산대 중문과 교수역임(<부산 인문학 뿌리의 현장2, 백산 안희제와 먼구름 한형석>, 국제신문 2013년 1월 15일 자)

- 이승만, 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현대사 2(박태균과의 대담)

-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 하우스(2014년), 154쪽

-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 하우스(2014년), 212쪽 

- 문화통(www.mtong.kr), 특집 광주, <전남 지방신문사 어제와 오늘>, 2013년 6월 20일 자, 광주문화발전소

- dictionary.sensagent.com/최인식

- 김시업, <풍죽처럼 사신 도남 조윤제 선생>, 논형(2008년), 218쪽

- 송남헌, <한국현대정치사 1권 건국전야>, 성문각(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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