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평생 함께할 동반자입니다"

록 음악(Rock music). 1950년대 미국에서 생겨난 대중음악의 한 장르다. 일반적으로 보컬, 기타,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되며 강한 소리와 비트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부활, 시나위, 백두산 등 많은 록 밴드가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아이돌 음악이 붐을 일으키면서 록을 포함한 많은 장르가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때 경남 창원에서 만들어진 한 록 밴드가 전국적으로 두터운 매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바크하우스(Barkhouse)가 그 주인공이다. 1998년 결성된 바크하우스는 20여 년이란 시간 동안 꾸준히 정통 록 음악을 고집해왔다. 특히 보컬 정홍일(41) 씨는 지역 곳곳에서 콜라보·게스트 제의가 들어올 만큼 실력파 보컬로 인정받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정 씨가 운영하고 있는 음악학원 '레드원뮤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명 같은 만남 뒤 결성된 바크하우스

문을 열자 정 씨가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길게 기른 머리와 중저음의 목소리는 상상하던 '록 밴드'의 이미지와 일치했다. 인기척을 내지 않고 잠시 기타 연주를 엿들었다. 이내 고개를 든 정 씨가 사무실로 안내했다. 우선 학창시절에 대해 물어봤다. 당연히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주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마산이 고향입니다. 학창시절은 평범하고 무난하게 지나갔습니다. 학교에 그룹사운드가 있는지도 몰랐고 록 음악보단 김현식, 박강성, 권인하 씨 노래를 좋아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광고기획사에 입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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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일 록 밴드 '바크하우스' 보컬. / 정홍일 씨 제공

정 씨는 회사에서 운명 같이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당시가 1994년도였습니다. 영업팀으로 한 분이 입사했는데 지금의 리더 형이었죠. 대학교에서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던 터라 음악에 관심이 아주 많았어요. 같이 차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록 음악이 담긴 테이프를 주더라고요. 그때 처음 록을 들었는데 신세계를 맛봤다고 해야 하나. 여러 악기들과 보컬이 뿜어내는 소리에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죠. 각자 퇴사를 하고 한참 뒤에 '같이 록 밴드 해보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습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수락을 했죠. 그렇게 바크하우스가 탄생했습니다."

두 명이 추가로 합류하며 바크하우스는 총 4명이 됐다. 일종의 '직장인 밴드' 개념이었다. 커버곡(기존에 있는 곡을 편곡해서 부르는 것)을 연습하다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 멤버들은 합심해서 앨범 작업에 돌입했다. 그 결과 2006년 '웰컴 투 더 바크하우스'란 1집을 발매했다. 2년 뒤 제8회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 참여해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를 발판 삼아 같은 해 2집 '시크릿 션사인'을 발표했다. 하지만 3집을 발표하기까지 무려 7년이란 시간이 소요됐다.

"멤버 개인별로도 힘든 일이 많았어요. 7년 동안 방황했죠. 다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3집을 발매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목표가 서니까 모두가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2015년 3집 '웨이스토리아'가 탄생했습니다."

한 조직이 20여 년간 이어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자존심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록 밴드는 더할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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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일 록 밴드 '바크하우스' 보컬. / 정홍일 씨 제공

"음악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고집과 욕심이 있어요. 혼자 활동하면 문제가 없지만 팀이 되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죠. 또 음악을 업으로 하는 밴드가 아니잖아요. 삶과 음악, 그 접점을 찾는 게 가장 힘들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음악도 할 수 있으니까요.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참 처절했죠."

반대로 정 씨는 음악이 힘들었던 순간들을 극복하게 해준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음악이 이겨낼 수 있게 해줬습니다. 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많은 힘이 됐죠. 밴드 활동은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고 하는 겁니다. 소중하지 않을 수가 없죠. 또 처음 목표로 삼은 게 '10장의 앨범을 발매하자'였어요. 그전까지는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웃음)"

정 씨는 2012년부터 레드원뮤직이란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창원에서 사무용품 관련된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기타 강의를 병행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부모님께서 좋은 장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계기로 일을 그만두고 학원을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학생들에게 기타와 드럼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보컬리스트가 되고 싶다

여기다 최근 정 씨는 '정홍일밴드'를 결성했다. 바크하우스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음악을 보여준다. 팝, 발라드, 포크 등 대중적인 음악이 주를 이룬다.

"정홍일밴드를 결성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우선 록 음악을 부르는 보컬리스트도 대중음악을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스스로에 대한 도전이죠. 더 깊이 있는 보컬리스트가 되기 위해선 장르에 구분이 있으면 안 돼요. 다양한 음악을 찾아보고 연습해야죠."

강하고 높은 고음을 주로 부르는 보컬리스트가 섬세한 감정을 표현하는 발라드를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발라드에 특화된 보컬리스트가 록 음악을 소화하기도 어렵다. 이런 기술적인 부분을 정 씨는 어떻게 극복했을까?

"저는 굳이 구분지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래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죠. 한 공연에서 관객 한 분이 '가사가 너무 잘 들려서 좋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죠. 물론 높은 고음과 기술적으로 잘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노래로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것. 그게 진짜라는 걸 깨달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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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바크하우스 1집, 2집, 3집 앨범 사진. / 정홍일 씨 제공

이처럼 정 씨는 바크하우스·정홍일밴드 보컬로 활동하고 음악학원까지 운영하고 있다. 힘들진 않은지 물어봤다.

"작년에는 스케줄이 너무 많았어요. 게스트로 참여하거나 콜라보 형식으로 공연도 했죠. 그래도 제가 시작한 일이니까 어떻게든 소화해야죠."

앞서 말했듯 과거 다양한 장르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아이돌 음악이 국내 음악 시장을 잠식하면서 관심에서 멀어졌다. 특히 우리나라는 록 음악의 불모지라고도 불리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 불만은 없을까?

"불만은 없습니다. 미디어가 급격하게 발전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로 인정해야죠. 다만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다 보니까 여러 장르를 사랑하던 사람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것이 아쉽습니다. 균형이 맞아야 문화가 더 발전할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죠."

이처럼 록 음악은 해외에서 더 인기가 있다. 최근 일본에서 공연을 했다는 정 씨는 그 수준 차이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일본 같은 경우 아마추어 밴드는 주말에 공연을 할 수 없어요. 격을 나눈 거죠. 물론 음악에서 격을 나눈다는 게 무조건 좋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추어 밴드들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자극제가 될 수 있죠. 또 공연 포스터도 철두철미하게 준비합니다. 거기다 음향 수준은 국내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하죠. 참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어린 시절 그 기억 속에

바크하우스 앨범에 수록된 여러 곡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뭘까? 정 씨는 단번에 '어린시절 그 기억 속에'라는 곡을 꼽았다.

"1집에 수록된 곡입니다. 녹음 막바지에 만든 곡인데 노래가 너무 어려웠어요. 키를 좀 바꾸고 편곡을 했습니다. 말 그대로 '빵' 터졌죠. 저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가사를 썼는데요. 사람들은 그 내용을 각자의 삶에 대입하더라고요. 참 신기했습니다. 이처럼 노래 한 곡이 누군가의 인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죠. 그런 과정을 통해서 평생 기억될 명곡이 탄생하는 것 같아요."

록 음악은 다른 장르보다 '저항 정신'이 담긴 노래들이 많다. 그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내고 음악으로 표현한다. 바크하우스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3집 앨범을 준비하면서 천안함·세월호 사건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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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일 록 밴드 '바크하우스' 보컬. / 정홍일 씨 제공

"두 사건을 겪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3집에 수록된 'Burial At Sea'란 곡을 만들었죠. '피하지 못한 그 운명들아 끝내 돌아오지 못하는가, 차가운 바다 저 깊은 곳에 너의 영혼을 묻어 두었나, 누구를 위한 누구의 의한 것인가? 밝힐 수 없는 또 다른 이유였던가? 얼마나 죽어야 끝내려나? 얼마나 죽여야 알겠는가? 서해안 바다 속 깊은 곳에 한없는 서러움 내 뱉어라…' 이런 내용입니다. 먹먹한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지역에도 음악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뮤지션들이 많다. 그러나 단순한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 씨는 음악을 하는 후배들에게 '본인만의 공연을 해보라'고 조언했다.

"개인 공연을 준비하면서 다른 연주자들과 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연습시간이 길어지자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 '한두 번 정도만 연습하고 공연하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처음에 든 생각이 '이렇게도 음악을 할 수 있구나'였습니다. 인정을 해야 하는데 힘들었죠. 관객들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공연을 보러 옵니다. 저희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룹사운드를 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다른 것보다 꼭 자신들의 공연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지인을 초청하고 발로 뛰면서 관객을 모집하다 보면 분명 음악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단계 성장해 있을 거예요."

음악은 평생 함께 가야 할 동반자

정 씨에게 음악이란 어떤 의미일까? 식상한 질문이었지만 꼭 묻고 싶었다.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던 정 씨도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갔다.

"이젠 평생 함께 가야할 '동반자' 같아요. 음악이 제 인생에 찾아왔던 많은 고난을 이겨내도록 해줬죠. 또 대중들과 소통하고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노래 한 곡에 복합적인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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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홍일 씨 공연 모습. / 정홍일 씨 제공

정 씨가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일까?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수익이 목적이 아닌 다양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꾸미는 거죠. 아니면 전문적인 공연을 하는 클럽도 좋습니다. 당장 현실적인 꿈은 바크하우스와 정홍일밴드의 디지털 싱글 앨범 작업을 마무리하는 겁니다. 빨리 결과물이 나와서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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