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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굉무의 음악이야기]노래로 부른 연애일기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고굉무 음악카페 해거름 대표 goingmu@dreamwiz.com 입력 : 2018-02-01 10:37:23 목     노출 : 2018-02-01 10:45:00 목

새해 벽두부터 30년 전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1987'이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며 흥행몰이하고 있다. 그토록 간절하게 염원한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처절하리만큼 몸부림쳤던 암울한 시절을 재구성한 시대극은, 시간이 한참 지난 이 시점에도 어느 누구에게나 진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 시절은 모두가 가장 힘들어했던 고난의 시기였으며, 엄청나게 큰 아픔을 겪었다는 것이다.

현대사의 변곡점을 그리며 민주화운동의 정점으로 치닫던 1987년말, 한국가요사에 한 획을 그으며 요절한 어느 천재 뮤지션의 소식이 신문 한 귀퉁이에 실렸다. 이때만 해도 젊고 유망한 작곡가 유재하의 죽음은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다.

그런데 3년 후 김현식의 사망과 더불어 그의 안타까운 죽음과 음악의 가치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평론가들은 유재하를 일러 당대의 걸출한 음악가로서, 대중 가요사에 그의 이름을 빗대어 이전, 이후를 나눈다 할 정도로 호평을 내놓았다. 그들은 유재하의 첫 앨범이자 유작이 되어버린 1집 <사랑하기 때문에>를 발매할 직후만 하더라도, 독특한 변조의 코드 진행 탓에 '노래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시큰둥하였다. 하지만 음악관계자들은 새로운 음악이 등장했음을 직감하였다. 이전에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클래식 음악의 화성과 재즈를 접목하여, 기존의 대중가요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노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유재하의 짧았던 생애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음악적 지향과 명곡 '사랑하기 때문에'가 만들어진 배경을 살펴볼까 한다.

유재하는 1962년 6월 6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에서 사업가인 부친 류일청과 모친 황영 사이에서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좋았던 그는 어릴 때부터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며 자연스레 자신의 꿈을 키워나갔다. 1969년 은석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는 이미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했고, 5학년에 접어들 땐 기타를 붙잡고 노래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봄여름가을겨울'의 멤버 전태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딱지치기와 담을 타고 놀 때 유재하는 어니언스의 노래를 부르며 혼자 놀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음악뿐만 아니어도 당시 또래들과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였다. 유재하가 중학교로 진학할 때엔 이미 예사 수준의 기타실력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바로 위 친형은 그의 기타연주를 보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치더라"며 당시를 회상하였다.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그는 프레시(Fresh)라는 그룹을 구상하기도 했지만, 끝내 클래식으로 진로를 선택하였다. 음대를 가기로 결정한 그는 고교 시절부터 피아노레슨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클래식보다 대중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유재하는 레슨 선생님이 내어주는 숙제보다 혼자 곡을 쓰고 노래 부르기 일쑤였다. 1981년 대일고를 졸업한 그는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 입학하며 음악 인생의 길로 접어들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정원영, 전태관, 김종진, 박성식, 장기호 등과 교류하며 음악을 듣거나 연주하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곤 했다. 이 무렵 작곡과 학생들에게 한 학기에 한 번씩 직접 작곡한 작품을 제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한 번은 대학 2학년쯤 되었을까? 유재하가 작곡한 악보를 건네받은 교수는 얼마 후 악보를 집어 던지며, "자네가 아무리 바빠도 모차르트를 배껴오면 어떡하는가"라며 심하게 나무랐다고 한다. 그의 작곡이 화성이나 악절 진행에서 모차르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다고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일화는 그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작곡, 작사, 편곡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피아노, 기타, 키보드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던 그는 대학 4학년 때인 1984년,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키보드 세션으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때 그를 지켜본 송홍섭은 "당시 대학생이던 유재하는 내게 굉장히 얌전한 학생이었고, 성품도 깨끗하고 맑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팝 음악에 대한 욕망은 대단했다. 재하는 앞으로 팝 음악에 있어서 자기 깃발을 확실히 꽂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유재하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있었다.

1985년 조용필은 자신의 정규앨범 7집에 유재하의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를 그보다 2년 앞서 먼저 발표했다. 약 2개월의 짧은 여정은 학교의 방침에 의해 그만두게 되었다. 대중음악 분야 아르바이트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그 시절의 관행에 의해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86년 리더 김현식이 결성한 '봄여름가을겨울'에 객원 멤버로 가입한다. 김현식은 건반, 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그를 두고, 밴드에 꼭 필요한 존재로 흡족해하며 매우 아꼈다고 한다.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던 김현식은 후배들에게 주먹을 앞세우며 리드하는 스타일인데, 구타와 집합에서 유재하만큼은 항상 열외시켰다. 또 유재하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김현식은 며칠 동안 폐인처럼 술·담배만 찾았다고 한다.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유재하 때문에 병을 얻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각별하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유재하는 대단한 애주가였다. 멤버들이 다 같이 술을 마실 때 다른 이들이 모두 나가떨어져도 둘은 밤새 마셨다고 한다. 오랜 지기였던 김광민에 의하면 "유재하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술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더 마실 정도였다"고 말했다. 한편 김현식이 새로운 음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유재하는 자신의 1집에 수록될 전곡을 내어 주었다. 하지만 후배 뮤지션을 편애하지 않고 모두를 챙겨 주기 위해 곡 하나만 가져간 김현식의 의도를 오해한 유재하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다는 서운한 마음을 품고 6개월 만에 밴드 활동을 그만둔다. 이때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은 타이틀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실린 김현식 3집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밴드 결별 후 그해 겨울, 베이시스트인 조원익을 찾은 유재하는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1987년 8월 마침내 데뷔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서울음반에서 제작하여 발표하였다. 2개월간의 녹음과정을 거쳐 발매된 데뷔음반은 그가 만든 9곡의 창작곡을 실었다. 앨범 작업을 하던 시점은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격동의 시기였지만, 그가 부른 서정적인 노래들은 시대의 분위기와 색다른 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사랑했던 한 여인과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하고 있다. 첫 만남부터 여러 번의 이별, 재회에 이르는 과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는 연애일기 같은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그의 생전 절친이었던 피아니스트 김광민은 "유재하의 노래에 등장하는 여인은 단 한 명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녀는 유재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으며, 졸업 후 못 만나다가 커서 재회했다"라며 노래들이 만들어진 사연을 들려주기도 했다. 실제로 그녀는 유재하의 1집에서 플루트를 연주했다.

첫 만남 이후 2년간 퇴짜를 맞으며 구애를 펼친 결과, 처음으로 받았던 편지를 소재로 '우울한 편지'가 만들어졌다. '그대 내 품에'는 사랑을 구애하는 그의 애타는 마음을 그렸고,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이 받아들여진 벅찬 기쁨을 나타내었다. '지난날'은 짧은 이별의 서글픔을,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는 다시 돌아온 그녀에게 바치는 헌정곡이었다.

1980년대 당시 음반사전심의는 가사나 메시지에만 잣대를 들이댄 것이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유재하의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음정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심의에서 반려되어 발매 시기가 많이 늦추어졌다. 심지어 방송심의를 위해 PD들 앞에서 피아노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으나 퇴짜를 맞았다. 거의 모든 노래가 파격적으로 정박자가 아닌 엇박자로 시작되는데, 익숙지 못한 PD들은 노래를 듣고 그를 박자도 못 맞추는 가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를 한층 더 낙담으로 몰아간 것은 일본 야마다가요제에 출품한 '지난날'마저 예선에서 탈락하는 불운이었다. 크게 상심한 유재하는 국내 음악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제 노래 들어 보셨어요? 우습죠?"라며 자조 섞인 상실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간은 '지난날'이 전파를 타면서, 모든 상황을 반전시켰고 점차 음반판매도 호조를 띠기 시작했다. 조금씩 '사랑하기 때문에'가 인기를 얻고 있을 때, 그는 벌써 다음 앨범을 계획하며 좀 더 나은 음반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하지만 동창회에 참석한 유재하는 술에 취해 운전대를 잡은 친구의 승용차를 타고 가다 중앙선을 침범하면서, 마주 오던 콜택시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이제 그의 나이 25세, 1987년 11월 1일에 일어난 사고였다.

유재하가 사망한 이후 대중과 음악전문가들은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추구한 음악을 재조명하였다. 3년 후 같은 날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연예계의 호사가들은 "먼저 간 유재하가 술친구가 그리워 그를 데리고 갔다"라는 말을 퍼트리며 11월 괴담설로 부풀렸다. 작사, 작곡, 연주, 노래가 가능한 싱어송라이터의 재능은 물론 편곡까지 도맡았던 유재하의 요절은 대중음악계의 큰 손실이었다. 2007년 그의 유작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는 경향신문에서 선정한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 목록에서 2위를 차지하며, 비로소 "대중음악의 수준을 외국 팝 이상으로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극찬을 받았다.

유재하가 떠난 지 2년 후인 1989년, 그의 천재적 음악성을 기리는 '유재하 가요제'를 개최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인 창작자들의 발굴과 등용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그의 음악은 사후에 재평가되면서 많은 뮤지션과 후배 가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처음 느낀 그대 눈빛은 / 혼자만의 오해였던가요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보로 만들었소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 분홍빛의 수 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

어제는 떠난 그대를 / 잊지 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 사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그대를 향해 / 작아져만 가는 나이기에

그 무슨 뜻이라 해도 / 조용히 따르리오

어제는 지난 추억을 / 잊지못하는 내가 미웠죠

하지만 이제 깨달아요 / 그대만의 나였음을

다시 돌아온 그대 위해 / 내 모든 것 드릴테요

우리 이대로 영원히 / 헤어지지 않으리

나 오직 그대만을 /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 유재하 작사·작곡 '사랑하기 때문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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