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아름다운 것 보며 지키는 직업
'사는 능력'보다 '하는 능력'이 더 중요

이번 해로 다섯 번째 농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 나를 '농부'라고 소개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나에게 "농부 맞아요? 별로 농사짓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하고 말한다. 하지만 내 손을 보면 모두가 "농부 맞네요"한다. 굵은 손마디,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이 내가 보아도 일하는 사람 손 같다. 한 번씩은 "아가씨 손이 와 이리 사내 손 같노"하는 말도 듣지만, 나를 '농부'라고 말하는 손이 싫지 않다.

'나는 어떤 농부가 될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문득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떠올랐다. 바로 '낭만'이다. 식구들과 밭에서 일을 하다가 "농부가 낭만 빼면 시체 아이가"하고 웃기도 한다. 농담처럼 말하지만 농부에게 낭만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고, 지켜갈 수 없다면 농부라는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연과 더불어 살다 보면 자연스레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내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낭만 농부가 되어야지.' 꽤나 멋진 생각을 해낸 것 같다.

'낭만'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라고 한다. 사전 풀이를 읽고 보니 내가 좋아한 낭만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상적' '이상적'이란 단어로 낭만을 풀이하는 것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낭만은 이런 것이다. 괭이질하다 힘이 들면 나무 그늘에 앉아 내 손으로 만든 박하차 한 잔을 마신다. 산밭에 가면 온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고운 새소리까지 들리니 어느 찻집 안 부럽다. 가을에는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산책을 한다. 바람에 밀려 길가에 모인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들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마을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주머니에 대추와 감, 밤과 도토리가 한 가득이다. 고무 바지를 입은 날은 바지춤을 잡고 걸어야 할 정도다. 출출하면 밭에 있는 늙은 호박 따다가 식구들과 돌아가며 속을 긁는다. 힘을 모아 긁은 호박으로 호박전도 부쳐 먹고 호박죽도 끓여 먹는다. 저절로 수다스러워지는 부드럽고, 달달한 맛이다. 가지와 고추, 오이와 옥수수 같은 토종씨앗 받는 일도 부지런히 한다. 햇살이 잘 드는 곳에 씨앗을 말릴 소쿠리를 나란히 줄지어 놓고 나면 얼마나 뿌듯하고 예쁜지 모른다. 요즘은 씨잉 씨잉 세차게 부는 겨울바람 소리를 들으며 구들방에 앉아 책을 읽고, 노래를 부르는 낭만을 누리고 있다. 나는 낭만을 '삶을 아름답게 보는 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에게 낭만은 '이상'이 아니라 '삶'이다.

얼마 전에 박노해 시인의 사진전 '라오스의 아침'을 보고 왔다.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쓰여 있었는데 깊이 공감되는 글이 많았다. 그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돈으로 '사는 능력'보다 스스로 '하는 능력'이 더 큰 사람. 평범한 일상을 선물의 순간으로 만들어내는 사람.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감사하며 나눌 줄 아는 사람. 그 맑고 환한 얼굴은 세상의 빛이다."

나는 '낭만'에 대한 뜻풀이로 박노해 시인의 글이 딱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하는 능력'을 가꾸어가는 사람들에게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투박하고, 서툴러도 그 삶에는 따뜻하고, 자연스러운 낭만이 흐른다. 박노해 시인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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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지. 작은 아름다움을 지켜갈 용기를 잃지 말아야지. 좋을 때도, 힘들 때도 자연에 기대어 살아야지. 그렇게 나를 잃지 말아야지. 낭만을 누리며 살아야지.'

※김예슬 씨가 경남도민일보 칼럼 필진으로 합류했습니다. 합천 황매산 자락 작은 산골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스물다섯 살 농부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나'를 잃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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