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유족·소방관까지 화재 트라우마 호소
병원 발생 특수성 더해져 정신건강 위험 수위

밀양이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 엿새째를 맞은 31일,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과 그들을 다 구하지 못한 사람 모두 죄책감에 빠져 있다.

생존자 151명과 사망자 39명의 유족, 생명을 구한 이들 모두 트라우마 소용돌이에 있다. 생존자들은 차에서 나는 작은 경적소리와 구급차 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환청을 듣거나 헛것을 보기도 한다. 한 어르신은 하얀 침을 뱉으며 "이봐라. 아직 침이 거멓다"며 자신의 손에 뱉은 침을 보여주었다.

◇끝나지 않은 화재 악몽 = 이번 화재로 다쳐 요양병원에 입원한 한 어르신은 "죽어도 곱게 죽고 싶다. 병원은 싫다"며 가족에게 퇴원을 요구했다. 가족은 노인을 설득해 겨우 자리에 눕히며 "원래 아버님께서 이러신 분이 아닌데 이번 화재로 병원에서 친하게 지내던 분을 잃으신 충격이 큰 듯하다"고 전했다.

소방대원에 의해 구조된 한 생존자는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검은 가래가 나온다며 손에 침을 뱉었다. 하얀 침이 손에 있었지만 그는 "아직도 침만 뱉으면 시커먼 침이 나온다"고 했다.

많은 생명을 구한 '의인' 요양보호사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안타까움을 크게 느끼고 있었다. ㄱ(58) 씨는 "구한 사람보다 미처 구하지 못했던 사람들 때문에 너무 괴롭다"며 슬퍼했다. 이 외에도 많은 사람이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고 있다. '타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손이 떨려 운전을 못 하겠다.', '잠이 들 때마다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찾아온다', '식당에서 생선을 굽는 냄새만 맡아도 토할 것 같다'는 등 다양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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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이겨내세요31일 밀양 세종병원 화재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있는 대한적십자사 심리회복지원센터에서 한 시민이 상담을 받고 있다.(위 사진)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지난 26일 세종병원 화재 참사 후 병원과 장례식장 등을 돌며 유족과 부상자 심리치료에 힘쓰고 있다. /이영렬 원장·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원망과 죄책감 내려앉은 밀양 =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은 참사를 겪은 밀양에 대해 '원망'과 '죄책감'이 깊게 깔렸다고 표현했다. 지난 26일부터 부상자와 사망자 유족 등에 대한 정부 심리치료 지원을 총괄하는 이 원장은 "화재 직후부터 매일 피해자를 만나고 있는데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 원장은 재난 피해 상담전문가다. 지난 2007년 태안 기름 유출사고, 2014년 세월호 사고, 2016년 경주 지진 등 굵직한 현장을 겪었지만 이번에는 유독 더 힘들다고 말했다. 화재는 짧은 시간에 극심한 트라우마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이 원장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2차 피해다. 그는 "피해자들이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충동적인 선택을 할까 가장 걱정된다"고 했다.

이번 참사 특징은 안전해야 하는 '병원'에서 발생한 화재라는 점이다. 이 원장은 "유족은 왜 다른 병원에 모시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과 왜 환자를 구하지 못했느냐는 분노 등이 뒤섞여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많아지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 원장은 특히 고령환자가 많았던 병원 특수성 때문에 생존자들이 알게 모르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 더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생존한 세종병원 직원도 위험군이다. 함께 일하며 일상을 나눈 동료를 잃었고, 경찰 수사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죄의 유무도 다루게 될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세종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생계에서 직격탄을 받았다. 이들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직종을 선택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 원장은 "앞으로 받을 스트레스가 더 커질 것이라는 점에서 병원 직원의 트라우마가 제일 걱정된다"고 말했다.

◇소방관도 트라우마 치유해야 = 1차적으로 유족과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가 최우선이다. 그다음은 소방관이다. 병원 화재에 투입된 소방관도 치유가 필요하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는 밀양 사정상 소방관도 고통을 호소한다. 실제 소방관 가족 2명이 이번 사고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소방관 1차 트라우마 치유는 대한적십자사 경남도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가 담당한다. 안인효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장은 “정신과 전문의 치료가 필요하면 심리지원단에 의뢰할 것”이라고 했다. 이 원장도 “센터에서 의뢰가 오면 소방관도 적극 치료를 할 것”이라며 “밀양 전체가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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