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몬티>속 셰필드의 시민공동체
연대와 관계회복이 도시 성공요건 웅변

영국 셰필드에 사는 가즈는 아들을 하나 둔 이혼남이다. 제철소가 문을 닫으면서 실직자가 돼 양육권도 박탈당했다. 사랑하는 아들 나단을 만나려면 매달 700파운드, 우리나라 돈으로 약 백만 원을 양육비로 전처에게 줘야 하는데 일자리 자체가 드물어 아들 만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같은 실직자이자 가즈의 절친인 뚱보 데이브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산다.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늘 시달린다. 같은 공장 감독관이었던 제럴드는 실직 사실을 6개월 동안 숨기고 출근 시늉을 하다가 결국 파산해 집에서 쫓겨난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또 다른 실직자 롬퍼는 자동차 배기가스를 마시고 자살하려다 데이브에게 발각돼 실패하고 만다.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가족과 이웃에게서 단절 혹은 고립돼가는 이들은 1990년대 중반 몰락한 철강 도시 셰필드를 배경으로 그린 영화 <풀몬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셰필드는 한때 영국에서 사용되던 철강 90%를 생산하던 철강산업의 메카였다. 일자리도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그러나 1973년 석유파동 이후 세계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며 허우적댔다. 경기가 침체하며 실업률이 증가했고 동시에 인플레이션까지 발생했다.

정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케인스 경제학은 도태됐고 '작은 정부'를 내세운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 1979년 영국 총리가 된 철의 여인 대처는 집권 기간 내내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기업의 자유를 제약하는 각종 규제를 완화했으며 노동운동 또한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공장 도시들이 두루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셰필드의 피해가 막대했다. 1982년에서 1991년까지 10년간 셰필드에서 무려 3만 6000개 직업이 사라졌다. 1984년에는 도시 실업률이 15.5%까지 치솟았다. 우리나라의 청년실업률이 현재 8%대 중반인 걸 고려하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풀몬티>는 그렇게 몰락한 셰필드의 실직자들 이야기다. 되는 일 하나 없던 가즈와 데이브는 어느 날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남성 스트립쇼에 동네 수많은 여인이 몰려든 장면을 발견한다. 그 정도 입장 수익이면 양육비를 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가즈는 데이브를 꼬드겨 스트립쇼를 준비한다. 자살에 실패한 롬퍼도 합류시키고 집에서 쫓겨난 제럴드도 영입했다. 파편화된 실직자들이 그렇게 한 팀을 이뤘다. 순탄치 않았지만 실직자들의 스트립쇼는 동네에서 화제가 되며 흥행에 성공했다. 객석은 동네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거기엔 가즈의 전처도, 데이브의 아내도 자리 잡았다. 얼치기 스트리퍼들이 끈적한 음악에 맞춰 하나씩 옷을 벗을 때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특히 열등감에 사로잡혔던 뚱보 데이브가 옷을 벗을 때 그의 아내는 온몸으로 환호한다. 가즈의 전처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스산하기 짝이 없던 마을은 오랜만에 활기를 찾았다. 무너졌던 관계들이 다시 회복됐다.

셰필드는 도시재생이 성공한 도시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리고 있다. 건축가이자 도시사회학자인 김정후 박사는 셰필드의 성공 요인을 다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는 정책의 일관성으로 1986년에 조직된 도시재생 관련 조직이 수십 년간 그대로 이어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과 지방정부는 물론 시민과 전문가들을 두루 아우르는 파트너십을 극대화했다는 점, 셋째는 도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원도심 활성화에 주력했다는 점, 그리고 넷째는 도시 내 역사문화적 자산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공공 공간을 조성했다는 점을 꼽았다.

김 박사의 통찰은 물론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뿐일까? 영화 <풀몬티>는 논리적인 보고서가 포착하지 못하는 미시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무너진 관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그 관계를 회복하고자 별의별 시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마침내 다시 연대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시민들의 공동체가 그려진다. 셰필드의 성공이 정부 정책과 전문가의 리더십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영화는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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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도시 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수백억 원의 예산이 각 도시에 떨어진단다. 그런데 이 돈 때문에 분위기가 심상찮다. 도시재생을 둘러싼 이해집단들이 이미 전쟁 상황에 돌입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자칫 도시가 재생되는 게 아니라 공동체가 파탄 날지도 모를 정도란다. 이럴 때일수록 본질적인 질문하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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