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기억의 산물 '가족 이야기'
일본 영화감독 집필한 소설
잔잔한 흐름 속 긴 여운 남겨

십오 년 전 세상을 떠난 장남의 기일에 모인 가족은 지독하게 능숙한 하루를 보낸다.

서로에게 감정의 날을 세웠다가도, 언제 그랬느냐는 듯 딴청인 모습이 잔망스럽기까지 하다.

장남의 존재감은 여전하다. 부재가 오히려 존재감을 키우는 반어적인 현실. 바다에 빠진 소년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장남은 가족을 잇는 유일한 끈이다.

설날보다 중요한 집안 행사가 곧 그의 기일인 것처럼.

일본의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소설 <걸어도 걸어도>가 지난해 한국에서 출간됐다.

동명의 영화는 평론가 호평과 더불어 감독에게 아르헨티나 마르델플라타 영화제 최고 작품상, 일본 블루리본 감독상, 아시안필름어워드 최우수 감독상을 선물했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설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개인적 경험과 기억의 산물이다. 가족의 이야기를 곧잘 풀어내기로 유명한 감독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 한 장면. /스틸컷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하루다. 장남의 기일에 모인 가족은 공간적 배경인 집에서 줄곧 대화를 나누고, 때로는 갈등을 겪는다. 웃음과 침묵이 불편한 감정의 골을 봉합하기도 한다.

은퇴한 의사인 아버지는 삭막하다. 어머니는 살가운 듯하면서도 가끔 소름끼치도록 솔직한 감정을 드러낸다. 아들을 둔 여성과 결혼을 앞둔 차남 료타는 철부지에 가깝다.

여기에 료타의 누나인 지나미와 그의 남편과 두 아이, 그리고 장남인 준페이가 목숨을 구해 준 요시오라는 인물과 함께 소설은 천천히 내달린다.

시공간을 공유하는 인물들은 감정의 큰 기복 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때때로 흔들린다.

료타는 형의 부재가 오히려 반어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순간을 참지 못하고 튀어나간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형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료타의 날 선 감정은 무심한 아버지에게 향한다.

감정의 골은 끝내 채워지지 않지만, 그것은 현실의 가족이 겪는 상황에 무척 가깝다.

"그로부터 상당히 긴 세월이 흐른 것만 같지만,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 이라든가 지금이라면 좀 더 이렇게 했을 텐데 라든가…. 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과 함께 가라앉아서,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다. 잃어버릴 것이 많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깨달음이다. 체념과도 비슷한 교훈일지도 모른다."(10쪽)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말은 기시감을 준다. 가족이라면 능히 경험했을 순간이다. 전하지 못한 말, 행동하지 못한 결심은 소중한 가족이 떠난 이후에 후회로 남기 마련이다. 떠난 사람은 말이 없지만, 남은 사람은 괴롭다.

또한, 한발 늦기에 뒤늦게 서로 이해하기도 한다. 차를 타고 아들과 장을 보러 가는 것이 소원이라는 어머니에게 무심히 약속하지만 끝내 지키지 못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서야 면허를 따고 차를 사는 료타는 그렇게 '한발 늦게' 부모가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서,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들도 아니게 되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나에게는 새 딸이 태어났다. 솔직히 말하면 그랬다고 해서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이런저런 후회나 상실감이 메워지는 따위의 일은 없었다. 잃은 것은 잃은 채로 그대로다. 다만 아이가 둘이 되니 차가 필요해져서 면허를 따고 차도 사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들은 이렇게 모양새와 상대를 조금씩 바꿔 가면서 반복되는지도 모른다. 기쁘거나 슬프다는 식의 알기 쉬운 감정은 아니다. 알기 어려운 만큼, 인생 그 자체에 가까워진 듯한 기분이다."(179쪽)

눈물을 강요하지 않고, 후회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자극하지 않아 오히려 여운이 길다.

182쪽, 민음사, 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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