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그 골목에 갔다] (2) 통영 도천동
윤이상 태어나고 자란 곳 생가 터에 기념관 들어서 전시실·공연장으로 탈바꿈
새미골 등굣길 걸으며음악에 대한 감성·열정 키워

통영시 도천동 골목을 10년 전에 찾았을 때 나는 윤이상에 대해 이렇게 썼다.

"1995년 타계할 때까지 그는 고향의 소리를 그리워했다. '엄마 뱃속에서는 엄마 얼굴을 몰라요. 고향에 있을 때는 고향을 모르죠. 이역만리 떨어져 있으니 고향의 얼굴을 알게 된 거죠.' 그가 태어난 도천동 갯가 노동요 속에 윤이상 음악의 원형이 있다. 남해안별신굿, 통영오광대 가락 등이다. 1935년 일본에 가기 전까지 체계적인 음악공부를 할 수 없었던 그에게 소리 본능을 심었다."

그저 쓰이는 글은 없다. 10년 전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윤이상을 잠깐 공부했을 것이다. 지금 기억조차 나지 않는 걸 보면 그게 얼마나 단편적 내용이었는지 알 수 있지만….

그렇지만, 나는 나를 대견하다고 다독인다. 남해안별신굿을, 통영오광대를, 도천동 갯가의 노동요를 〈경남도민일보〉 지면에 언급했던 것이다. 윤이상이 감옥에서 만든 <나비의 미망인>도, 이역만리 독일에서 동포의 집단적 죽음을 접하고 만들었던 <광주여 영원히>나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언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생생한 기억은 1917년 도천동 출생 윤이상이 유년시절 걸었던 골목이다. 골목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감수성이 얼마나 다양한지 감탄했었기 때문이다. 그가 도천동 골목에서 들었던 풍금 소리가, 바이올린 소리가 후일 음악가 윤이상을 잉태한 음악적 감수성이 됐다. 음악을 듣고 노래하기는 좋아하지만, 다루고 만들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게 신비스러웠다.

언젠가는 다시 찾겠다, 마음먹었던 걸 10년 만에야 나는 이행했다.

10년 만에 찾은 도천동 골목은 윤이상 생가가 사라지고 기념관이 들어섰다. 기념관 광장에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뛰어놀았다. '머시마' '가시나' 할 것 없이 "까르르르" "후다다닥" 뛰어놀았다.

10분이 지났을까? 그 아이들이 한순간 어느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따라갔더니 합창 연습실이었다. 윤이상기념관 1층의 합창 연습실.

아이들은 통영시립소년소녀합창단원이었다. 아이들은 뛰어놀다 발그레 상기된 얼굴 그대로 곧 있을 공연 준비를 시작했다. 악보가 보였다. '심청가 중 ○○○', '아름다운 나라' 등. 윤이상이 음악에 젖어들었던 초등학교 3학년 때처럼 지금 아이들이 윤이상에 스며들었다. 통영 아이들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독일과 통영이라는 공간을 넘어 윤이상과 만났다. 통영 아이들이 받고 있는 은혜다.

기념관을 벗어나 윤이상의 초등학교 등굣길을 따라 걸었다. 새미골 골목이다. 생가 터의 골목은 사라졌지만, 산복도로에 이르는 미로 같은 골목은 살아 있다. 이불이 널려 있던 10년 전 모습은 아니다. 그때 팔순이었던 서 씨 할머니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골목에 있는 음악벤치는 운치가 그만이다. 거기 하염없이 앉아 평소 접하기 어려운 그의 음악을 접한다.

전기 <윤이상>의 저자 박선욱은 통영공립보통학교 때 윤이상을 이렇게 썼다.

"통영에는 굿이 많았다. 죽은 넋을 위로하는 진혼굿. 죽은 혼을 불러내거나 귀신을 쫓는 의식이 펼쳐졌다. … 유랑극단은 시골 장터에 천막을 치고 무대를 만들었다. 각설이패나 어릿광대가 북, 장구를 치며 공연을 알렸다. 언젠가 판소리 명창 이화중선이 왔을 때는 고수 뒤로 태평소, 아쟁, 장구, 대금 악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보통학교 3학년이 된 뒤 새로 부임해온 음악선생님 때문에 윤이상은 학교생활이 즐거웠다. 이 무렵엔 집 근처 예배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풍금을 만지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음악에 대한 그의 향학열은 여기서 태동했다. 풍금을 접하고 바이올린을 접하고, 기타를 배우고 첼로를 배우고, 악보를 읽고 악보를 만들고…. 서울로 일본으로, 마흔 나이에 유럽으로, 그의 음악 의지는 끝이 없었다.

윤이상의 음악 의지는 사상으로 도약했다. 사람과 사물, 세계에 대한 철학으로 확장됐다. 집안을 일으키고 출세를 원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진로를 세우는 데서부터 생애 초기 30년을 지배한 일제강점에 대한 저항까지, 그리고 중후반 50년을 따라다닌 분단조국 현실에 대한 극복의지까지 무한했다. 윤이상기념관 2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음악관은 그 자체로 세계관이요, 사상이다.

새미골 막바지, 숨을 헐떡거리며 오른 산복도로 안내판에는 충렬사 1㎞, 세병관 2㎞라고 돼 있다. 소년 윤이상은 그보다 더 멀었을 언덕길을, 고갯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렬사에도, 역시 이순신의 전승을 기념해 만들어진 조선시대 해군본부 격의 세병관에도 아이들이 많았다. 저 아이들이 장차 윤이상이 되고, 이순신이 될 것이다.

이제 곧 윤이상 선생이 통영에 돌아온다. '육'이 사라진 '유해'로 돌아온다. 혼으로 돌아온다. '끝내' 돌아온다. 부인 이수자 여사와 바람이 앞섰다. 이를 받아 통영시와 독일 베를린시가 협의한 결과다. 독일 유학 이후 생전에 오지 못했던 고향, 오매불망 독일의 침실에 붙여두었다던 강구안으로 돌아온다. 

2006년 10월 30일 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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