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해서 고단한 삶 사는 게 아니라
윤택한 삶 누리는 이들 있어 그런 것

겨울 한파가 남하해 진주지역이 영하 12도까지 내려간 지난 12일 토요일. 여느 때처럼 새벽 5시 30분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듣고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렸다. 배드민턴 운동복에 외투를 걸쳐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유리에 하얗게 붙은 성에를 긁어 내고 냉장고 속 같은 차에 들어가 핸들을 잡는데,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들어와 심장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좀 더 일찍 시동을 걸어둘 걸' 짧은 후회를 뒤로하고, 핸들이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체육관을 향해 달렸다. 골목길을 돌아 나가는데 눈앞에 청소차 한 대가 보였다. 청소차를 앞질러 가는 짧은 순간, 얼른 쓰레기 봉지를 화물칸에 던져 넣은 뒤 다시 차에 매달려 가는 청소부를 보았다. 벙거지를 눌러쓰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검은 마스크에 두꺼운 스키 바지 차림이었지만, 그것으로 몸속으로 파고드는 추위를 막아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얇은 털장갑 구멍 사이로 뚫고 들어오는 송곳바람이 느껴지는 듯했다. 청소차를 지나쳐 옥봉동 말띠고개 쪽으로 가는데, 이번엔 박스때기를 수레에 싣고 느림보 걸음을 걷는 굽은 등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새벽 운동을 나서며 승용차 안에서 한기를 느끼는 나의 겨울과 얼음장 같은 손잡이를 부여잡고 청소차 뒤에 매달려 온몸으로 칼바람과 맞서는 청소부의 겨울, 홀로 움직이기에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맨손으로 리어카 핸들을 감싸쥐고 골목을 헤매는 할머니의 겨울. 뉴스에서 전하는 겨울 한파는 영화 12도로 동일했지만, 세 사람이 느낀 추위는 이렇듯 차이가 난다. 세 가지 겨울은 아무 상관없는 듯 보이지만 모두 연결돼 있다.

내가 그 시각 운동을 나설 수 있는 이유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생활쓰레기를 수집해 내동쓰레기 매립장에 버려주기 때문이다. 더 싼 택배를 골라 주문한 내 마우스 클릭질은 밤늦도록 물건을 배달해야 겨우 하루 생활비를 벌 수 있는 택배기사의 고단한 삶을 만들어낸다. 내 안락한 삶이 관절염에 시달리는 몸으로 박스때기를 주워 모아 킬로그램당 100원 안팎에 내다파는 할머니의 힘겨운 삶을 만든 것이다.

세상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나태해서가 아니라 윤택한 삶을 누리는 부자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두가 쉬쉬하며 말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이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켠 라디오에서 최저임금이 16년 만에 최대폭으로 인상돼 무인 편의점이 들어서고, 일부 기업체는 고용을 줄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짜장면 가격까지 껑충… 서민 지갑도 '한파'". 기사를 읽어 볼 필요도 없이 의도가 빤히 보이는 오늘 아침 인터넷 기사 제목이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심기가 불편한 기업체 사장의 등을 긁어주고 싶은 기자의 마음을 본 듯해 내가 다 부끄러워진다. 인상된 최저임금 1060원은 '한파'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까워하면서, 삼성전자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55조원은 왜 '수익'이라고 하는 걸까. 기업이 수익을 올렸다는 것은 투자한 돈에 비해 물건을 비싸게 팔아 많이 남겼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국민들이 제품을 원가보다 비싸게 산 것이다. 기업이 잘돼야 고용을 늘린다고? 그래야 모두가 잘 살게 된다고? 그러면 정작 노동자들이 너무 싼 노동을 조금만 비싸게 팔겠다고 하면 왜 그리들 세상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가.

최저임금이 1060원 인상돼 세상이 굴러가지 못하고 당장 멈춰 설 것처럼 호들갑 떠는 기자도, 무인 판매기를 들이겠다는 편의점 점주도, 고용을 줄이겠다는 기업체 사장도, 최저임금을 결정한 위원회 위원들도 최저임금을 받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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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줄여 학비라도 보태려는 알바생과 하루 12시간 일해도 작년 최저임금만큼도 벌기 어려운 택배기사와 눈치보며 임금 인상을 바라는 외국인 노동자와 같은 일을 하고도 차별을 받는 여성노동자의 고단한 삶이 그들의 윤택한 삶을 만든 원천이다. 최저임금을 들먹이며 국가 경제와 미래를 걱정하는 척 주판알을 굴리는 애국자들의 입이 쏙 들어가게 할 방법이 있다. 최고임금을 정하는 것이다. 최소한 받아야 할 임금선도 중요하지만, 최고선을 넘을 수 없도록 규제하는 것이 국가 경제를 위해 훨씬 도움 될 것이다. 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는 최고액을 최저임금의 10배나 20배까지로 정한다면 놀고먹는 살찐고양이들의 다이어트에도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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