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 잃은 마을에도 꽃은 피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 진주 옥봉동에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던 한 백정 출신 재산가가 있었다. 노골적인 신분 차별에 번번이 입학을 거절당한 재산가는 한 청년 운동가를 찾아간다.

재산가의 이름은 이학찬, 운동가의 이름은 강상호다. 둘의 만남은 신분 질서를 '형평'으로 만드는 운동으로 이어졌다.

지금의 비탈진 언덕과 좁은 골목길은 진주 옥봉동의 한 단면일 뿐이다. 뭉뚱그려 달에 가까운 동네라 불리지만, 진주 근현대사에서 옥봉동을 빼놓기 어렵다.

그런 옥봉동의 언덕과 골목을 경상대 실습생 세 명과 함께 걸었다. 세 사람의 눈에 비친 옥봉동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달랐다.

이날 함께 걸은 거리 2㎞. 3025보. /정리 최환석 기자 

옥봉동에는 아름다운 벽화 만들기 활동 중 하나로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최환석 기자

진주 도심 속 '외딴섬'도시재생사업 한창인 곳

영하의 기온과 매서운 칼바람에 진주 도심은 꽁꽁 얼어붙었다. 옥봉동을 둘러보려고 한적한 옥봉삼거리에 들어서니 고려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에 세워진 사당 '은열사'가 보인다. 진주 강씨 자랑인 이곳을 지나치는 후손들은 이름깨나 떨친 선대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옥봉동 산기슭에는 낡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판자촌, 달동네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은 '진주 옥봉 도시재생 사업계획' 진행이 한창이다. 콘크리트벽은 색이 칠해져 있는데, 케케묵은 세월의 때를 덧칠하려는 도시재생사업 하나이겠다.

성인 남성이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닿을 것만 같은 좁은 골목과 울퉁불퉁한 길이 있는 이곳이 진주 도심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누가 상상할까.

"여기 뒤로는 길이 없는데!" 털모자로 얼굴을 가린 노인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한다. 갈 곳 잃은 다리가 당황해 뒷걸음친다. 골목은 미로처럼 알 수 없고 동네는 고요하다.

우여곡절 끝에 길을 찾아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동시에 깎아지른 듯한 높이에 무릎이 동요한다.

드문드문 인기척이 느껴지나 휑하게 열린 대문과 주인 없는 폐가를 찾기가 더욱 쉽다. 거미줄은 빨랫줄처럼 길게 걸려 있고, 금방 가루가 되어 내려앉을 것만 같은 마룻바닥과 흡사 전쟁터 같은 방안은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폐가 주인인 듯 고양이 한 마리가 마루에 걸터앉아 노려본다. 높은 터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도로를 경계로 늘어선 아파트가 옥봉동 판자촌과 대비를 이룬다.

"거기는 주인이 없어. 어디서 왔는데?" 올해 76세인 한 노인은 옥봉동에서 보낸 세월을 더듬는다.

"여기는 이제 사람이 얼마 안 남았어. 거의 다 가뿟지(죽었지). 엊그제 할머니 한 명도 가고 이제 없어. 집 뜯어고치는 거는 됐어. 이대로 살다 가면 돼."

불편한 다리로 가파른 비탈을 능숙하게 내려가는 노인은 당장 먹고살 일이 바빠 도시재생사업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새 단장에 여념이 없는 옥봉동이 간직한 마지막 겨울을 뒤로하고 언 비탈을 내려간다. /실습생 안지산

진주 옥봉동 한 주택. 주인 떠난 집 주변으로 풀이 무성하다.

곳곳 보이는 버려진 집...동물 소리 간간이 들릴 뿐

진주에 소방차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길이 있는 동네가 있다. 옥봉동이다. 강민첨 장군 탄생지인 은열사에서부터 걷었다. 은열사는 고려 현종 때 병부상서를 지낸 은열공 강민첨 장군을 기리고자 진주 백성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사당이다.

은열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걷는다. 골목 사이사이 볕이 잘 들지 않고 버려진 집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집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집은 보일러를 켜놓았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나왔으며 사람 사는 모습도 하나둘 보인다.

손수 깎은 밤을 손수레에 담고 길을 나서는 한 노인과 마주친다. "이쪽에 남은 집은 우리 집과 두 집 말고는 없을 거야."

길을 쉽게 찾지 못해 인근 주민에게 길을 묻는다. 그렇게 찾아 오른 공간에는 벽화가 그려진 집들이 있다. LH와 YMCA, 진주시가 후원한 '아름다운 벽화마을 만들기' 활동 하나다. 벽화 주제는 '꿈꾸는 도시'다. 형형색색 벽화와 대비하는 동네는 고요하고 개 짖는 소리만 들린다.

옥봉동에는 진주향교가 있다. 987년 고려 성종 때 향학당을 창건해 중앙에서 교수를 파견했으며, 1398년 조선 향교로 이어졌다. 중학교를 진주에서 나왔는데, 그때 향교에 들러 예절교육을 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다시 찾은 향교는 그대로다. 향교에서 받은 교육은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한여름 땀을 쏟으며 친구들과 좁은 길을 따라 향교로 향했던 기억은 생생하다. 그때 기억을 떠올리니 옥봉동이 조금 더 정감 있게 느껴진다. /실습생 김혜주

은열사.

새 단장이 끝나고 나면 새 이야기 시작되겠지

나는 나비, 옥봉동에 5년째 거주한 터줏대감 고양이이다. 나른한 오후 맑은 날씨에 버려진 지 오래인 나의 아지트 지붕에 올라 햇빛에 몸을 말린다. 늘 조용한 우리 동네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린다.

"와, 골목이 너무 가파르다." "20년 넘게 봐왔는데 여기서 본 진주는 낯설다. 그렇지?"

낯선 인간들은 아지트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쫓아내볼 심정으로 경계음을 내본다. 무서워 보이지 않는지 나를 보며 웃는다. 사진을 찍고, 뭔가 적더니 '안녕' 하고 인사를 건다. 무슨 짓을 하려나 궁금해져 뒤를 따라가 본다.

인간들은 밤을 팔러 집을 나선 노인에게 인사를 건다. "할아버지, 여기는 동네가 텅 비었네요." "응, 여기는 두 집밖에 안 남았어. 다 이사 가뿌고(가버리고) 저기 사는 노인은 며칠 전에 초상 치르고."

길고양이가 주인 없는 집 처마에 앉아 있다.

인간들은 골목이 낯선지 자꾸 막다른 길로 가려 한다. 가파른 오르막으로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해본다.

"여기가 LH 마을 조성사업 구역인가봐. 벽화가 예쁘다." 지난해 마을이 들썩였다. 페인트를 든 사람들이 마을에 그림을 그리고, 꽃을 심고는 떠났다.

떠나는 인간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슬프다. 저 넓은 언덕에 두 집밖에 안 남았다니. 이렇게 동네가 사라지나봐." "아냐. 또 새로운 동네의 이야기가 시작되겠지." /실습생 강소미

옥봉동에서 내려다본 진주 시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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