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신숙주가 비난받은 건 변절 때문
새 집권당으로 부나비처럼 몰려들어서야

거제 반곡서원에는 우암 송시열을 주벽으로 김창집과 김진규가 배향되어 있다. 송시열은 인조부터 숙종까지 네 명의 왕을 거치면서 정치 활동을 한 인물이다. 효종과 효종비 상을 치르면서 자의대비가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벌인 두 번째 예송논쟁에서 정권을 빼앗기고 귀양을 가면서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남인에게 정권을 맡긴 왕이 서인이었던 송시열의 제자에게 스승 있는 것만 알고 임금 있는 줄은 모르는 자들이란 서슬 퍼런 힐책을 해도 오히려 왕을 설득하려 했다. 남인이 경신환국으로 실각하자 다시 정권을 잡았던 송시열이 이번에는 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두고 숙종과 부딪힌다. 왕이 아직 나이 젊은데 후궁 소생의 어린 왕자를 서둘러 원자로 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미 종묘사직에 고한 일을 물리라 하니 숙종은 임금을 깔보고 능멸한다 하여 제주로 유배를 보낸다. 송시열은 이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왕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자 대신은 역적이 아니면 극형에 처하지 않았음에도 국문을 받으러 서울로 압송하던 그에게 금부도사를 보내 사약을 내린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자 김창집은 훗날 영조를 왕세자로 삼자고 주청한다. 김창집은 병자호란에서 결사 항전을 주장하다 가노라 삼각산을 읊조리며 청나라로 잡혀갔던 김상헌의 증손이다. 이어서 병약한 임금을 대신해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하였다가 소론에게 역모로 몰려 거제와 상주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약사발을 얼른 마시라고 재촉하던 금부도사는 조광조의 종손 조문보였다. 그를 보며 네 선조를 떠올리지 않느냐고 일갈한 뒤 사약을 마셨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의 조카인 김진규는 스승을 배반한 윤증을 호되게 꾸짖었다. 그 역시 원자 책봉을 두고 벌어진 기사환국으로 거제에 유배되었다. 꼬장꼬장한 이 선비들은 유배지에서도 기개를 굽히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아 담론하고 가르쳤다. 그러기에 영남 사림이 주류인 거제 유배지에다 기호학파이지만 그들을 기려 서원을 세우고 배향했다.

이에 반해 그렇지 못한 인물도 있다. 계유정란으로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등극하는 데 공을 세운 정인지와 신숙주는 이후 한명회나 권람보다 더 혹독한 비판을 받는다. 그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공이 컸으나 문종의 당부를 저버린 변절자였기 때문이다. 출중한 인물이었음에도 간신이나 권신으로 욕을 먹었던 유자광이나 임사홍, 김자점보다 더한 경멸의 대상이었다. 그 예로 잘 쉬어 상하는 나물에다 이름을 넣어 숙주나물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치욕을 안기고 있다. 율곡 이이가 아끼던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옮겼다는 이유만으로 왕을 비롯해 서인은 물론 옮겨갔던 동인에게조차 배척당하다가 뚜렷한 물증도 없이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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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왕은 국민이다. 왕이 올해 무술년 유월에 친히 각도 관찰사와 고을 현감을 제수하고 향소의 향원을 뽑겠다 하니 실각한 당에서 세도를 부리던 이들이 새 집권당으로 부나비처럼 날아든다. 왕이 서인을 버리고 남인을 등용한다고 뿌리부터 다른 남인의 담장을 기웃거리는 게 옳은가. 아니면 왕의 마음을 서인에게로 돌리고자 도끼를 지고 상소를 올리는 게 올곧은가. 거기다 신숙주나 정여립조차도 혀를 찰 일도 서슴지 않는다. 같은 서인에서 노론 소론으로 분당했는데 노론에 힘이 실리니 뻔뻔하게 되돌아가질 않나. 남은 소론도 슬그머니 북인과 머리를 맞댄다. 왕의 마음을 되돌리고 당색을 지키기는커녕 간도 쓸개도 없다. 통만 차면 똥이고 된장이고 마구 퍼 담는 형국이다. 이렇게 되면 뜻을 같이하는 붕당(朋黨)이 와르르 붕당(崩黨)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자들을 철새에 비유하는데 철새는 오히려 제 길을 벗어나 날지 않는다. 꼭 비유하자면 박쥐가 맞겠다. 개도 주인이 곤궁에 처하면 목숨을 바쳐 지키고 돼지 새끼도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젖꼭지를 바꿔 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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