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설희의 드롭 더 비트] 1화 2002년, 첫 느낌
TV·라디오서 나왔던 음악 취향·장르 불문 인기곡 뿐
힙합을 듣는 순간 '신세계'
마스터플랜 앨범 시작으로 10년 이상 즐겨 듣는 음악 내 인생의 소중한 존재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했던가요. 한 분야를 집중해 파고들면 자기 나름으로 이치를 깨치게 됩니다. 여기에 재미까지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지요. 경남도민일보 임직원 중에도 재밌게 격물치지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소할 수 있는 개인 취미일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일상에 활력을 주기도 하지요. 독자 여러분과 함께 경남도민일보 임직원들이 풀어내는 색다른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지난달 시작한 편집부 우보라 기자의 맥주이야기 <곤드레만드레>에 이어 전산부 김설희 직원의 힙합이야기 <드롭 더 비트>가 이어집니다. 드롭 더 비트(Drop the beat)는 힙합 음악에서 래퍼들이 랩을 시작하기 전에 쿵짝쿵짝 하는 '비트를 달라'는 뜻으로, 일종의 유행어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격물치지도 열렬히 환영합니다. 어느 분야든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분은 언제든 이서후 기자(who@idomin.com)에게 연락주십시오.

27년 인생 중 반 이상을 나와 함께 한, 지금도 옆에 있는 소중한 존재가 있다. 약간은 오글거리지만 그것은 바로 '힙합'이다.

힙합은 나의 학창시절 등·하굣길을 함께하던 친구, 교과서에 없던 세상을 알려준 선생님, 내성적인 나의 마음을 대변해준 대변인 같은 존재였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 나와 결혼을 앞둔 남자친구는 자신이 내 인생의 첫 번째 동반자라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15년 전부터 힙합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02년 초등학교 5학년 때로 거슬러 가보자. 당시 내가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매체는 TV와 라디오뿐이었다. 물론 인터넷도 있었지만 초등학생이 직접 음악을 접할 수 있는 사이트는 없었다. TV와 라디오는 취향 불문, 장르 불문, 그저 인기순위에만 들어 있는 곡이라면 무조건 내보냈다. 나는 강요 아닌 강요로 그런 곡들만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예를 들어 아마 내 또래들은 GOD(2000년대 초반 최고 전성기를 보낸 아이돌 그룹) 팬이 아니더라도 그들의 노래 가사는 다 외우고 있을 것이다.

▲ 마스터플랜 외 즐겨 듣는 앨범들.

TV를 틀어도 라디오를 켜도 길거리를 지나가도 심지어 친구 미니홈피에 들어가도 다 똑같은 노래들뿐이었다. 방송국 PD와 라디오 DJ 그리고 미니홈피의 주인이나 가게 주인이 아닌 이상 그냥 계속 들어야 했다. 반복적인 삶에 반복적인 노래라니 초등학생에겐 얼마나 비극적인 삶인가.

비극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를 따라 레코드 가게를 가는 것이었다. 당시 아버지도 어쩌면 천편일률적인 트로트메들리에 지쳐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병상련(?)이었는지, 아버지는 내가 갖고 싶은 CD는 얼마든지 사주셨다. 애석하게도 레코드 가게마저 인기순위 앨범만 가득했지만 피가 안 통할 때까지 고개를 숙이거나 닿지 않는 곳까지 팔을 쭉 뻗으면 간단하게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간혹 앨범 커버에 잘생긴 오빠들 사진이 있는 앨범을 골랐다가, 한 달 뒤 그 앨범이 인기순위에 올라 시시때때로 들어야 하는 대참사가 생기기도 했다.

힙합을 처음 들었던 그날도 아버지를 따라 레코드 가게에 갔었다. 어김없이 잘생긴 오빠들 사진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는 가수 이름들만 적힌 앨범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다 동양화에 레코딩 기계를 만지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한 느낌이어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그저 퓨전국악 앨범이라 생각했던 예상을 깨고, 스피커에서 잔잔하고 경쾌한 힙합 비트가 나오던 처음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앨범이 바로 훗날 국내 힙합 음반의 전설이 된 마스터플랜의 'MP Hiphop 2002 風流(풍류)'였다. 마스터플랜은 힙합 음악으로 시작해 지금은 인디 밴드 레이블이 된 마스터플랜 프로덕션을 말한다.

이 앨범에는 현재 국내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모두 아는 뮤지션들의 옛 시절 음악들이 담겨 있다. 15년 전 청초했던 바스코의 목소리도 담겨 있고, 지금은 정기고로 활동하는 Cubic(큐빅)도 있다. 당시 비트를 프로듀싱한 이는 '이밀라 국거리'라는 구수한 이름인데, 지금은 유명한 힙합 음악가인 '넋업샨'이다. 그 외에 주석, 원썬, 더블케이, 데프콘, 김진표, 버벌진트도 있다. 이 앨범에는 내가 킬링 트랙(가장 좋아하는 곡)이라 할 수 있는 두 곡이 있다. 힙합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기도 했던 곡 '첫 느낌'과 'How B Do'가 그것이다.

이렇게 마스터플랜으로 시작한 힙합은 이후 내 생활 자체가 되었다. 힙합바지를 입고 CD플레이어를 든 채 거리를 누비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퇴근길 남몰래 갱스터 힙합을 듣는 나는 여전히 힙합으로 살고 있다.

힙합이라는 장르는 어느새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내뿜고 있다. 국내에 '힙합의 대중화'가 이뤄졌다해도 무방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요 음원 사이트 차트 상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는데, 어느덧 꽤 굵직한 자리를 꿰차며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 몇몇은 음원 차트를 '올킬(점령)'하는 성적을 내보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엠넷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와 같이 상업 방송에서 힙합이 자주 노출된 덕분일 테다. 꽤 오랜 시간 국내 힙합신(힙합 음악계)을 관심 있게 들여다본 나에겐 신기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이제 힙합은 대중과 마니아층이라는 전혀 다른 두 시각을 고스란히 받고 있다. 난 언제나 그 둘의 경계에 서 있다. 힙합을 사랑하지만 단 한 번도 래퍼가 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한 적이 없고, 현재도 '마니아'라고 하기엔 다소 쑥스러움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하루하루 랩을 듣고 감상 기록을 남긴다. 또 좋아하는 힙합 아티스트의 옷차림을 어설프게 흉내를 내기도 한다. 힙합은 이제 내 몸과 마음 생각 전체를 아우르는 동반자다. 앞으로 어떤 힙합을 듣게 될지 혹은 다른 장르에 빠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일에 찌들어 퇴근하면서 갱스터 힙합을 들으며 힐링한다.

※ 아래 QR 코드로 들어가면 나의 킬링 트랙, 마스터플랜 '첫 느낌'과 'How B Do'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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