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친구 글 '좋아요'는 목례·미소
긍정요소 소통·공감 신호로 새해 시작

"친구를 잃어버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시 접촉하는 주도권을 그에게 맡겨두는 것이다. 그러면 머지않아 그가 꼼짝도 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새해 아침에 '미셸 트루니에'를 읽으며 저 문장과 맞닥뜨렸다. 그리고 그 친구를 생각했다. 그와는 뜻밖의 일로 소원해졌다. 페이스북에서 마주쳐도 소 닭 보듯 스쳐 지낸 것이 우금 일 년이다.

60년대 후반에 만든 SF 영화 <스타트랙>에선 손목시계 모양의 모니터로 화상통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좀 그럴듯이라도 해야지 설정이 너무 황당무계한 '구라'라며 삐쭉거렸었다. 동네를 통틀어 전화 한두 대 겨우 있을 시절이었으니 당연하다. 아무리 선견지명이 있다 하나 손바닥만한 개인용 컴퓨터 속에 해상도 정밀한 카메라가 들어앉은 전화기를 애어른 할 것 없이 범국민적으로 주무르는 꿈을 그때 어찌 꿀 수 있었으랴.

"함부르크에 사는 16세 소녀가 자신의 '생일파티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무려 1400여 명의 사람이 선물을 들고 와 교통정리를 위해 경찰이 출동했다"는 기사가 해외 토픽으로 뜬 것이 2011년께다. 그때만 해도 SNS라는 낯선 물건에 뜨악해하며 멀찌감치서 흘깃거리기만 하던 시선들을 사로잡는 선정적 기사였다. 아마 많은 이들의 입문 동기가 되었으리라. "뉴욕서 푸드 트럭을 몰며 빵을 구워 파는 교포 청년이 장소를 '트위터'로 공지해서는 옮겨서는 곳마다 몰리는 사람들로 빵이 불티나게 팔린다"는 토픽에 도전받아 신문물인 '트위터'란 걸 학습해보자 내가 작정했듯이. 그래서 접한 초기 트위터는 명망가에 폴로잉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폴로어를 얼마나 거느리느냐가 그 개인이 집단에 끼치는 영향력의 척도가 되는 풍으로 흘렀다. 돈을 받고 폴로어 수를 확장해주는 장사꾼이 들러붙고 폴로잉 군단을 거느린 인사에 스폰서가 붙는 걸 보며 슬슬 정나미가 떨어졌다. 치우침 없는 쌍방향의 소통이 아니라 누가 누군가를 추종하는 방식이 거슬렸던 것이다. 게다가 사실관계가 잘못된 트위트임에도 많은 지지를 받는가 하면 옳은 말을 한 사람이 패거리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는 꼴을 보며 트위터를 접었다. 그리고 들여다본 것이 페이스북이다.

맹자를 어찌 들먹이랴만, 페북 친구도 엄연한 친구니 시작하며 작정하기를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 하였다. 하지만, 그따위 말은 번드르르한 허세일 뿐. 또래라곤 눈 씻고 뒤져봐도 찾기 어려운 이슥한 연식의 화상에게 낯선 이가 친구삼자 해온다면 버선발로 달려나가 맞을 일이었다.

페이스북은 간략한 프로필과 본인 사진을 드러냄으로써 익명성을 내세워 끼치는 부정적 요소를 걷어낸 것이 확장력을 높였다. 역기능과 폐단을 말하지만, 세상 만물에 호오가 혼재하니 좋다 궂다를 일방으로 탓할 일은 아닌 듯하다. 다양한 층위의 좋은 친구를 여럿 얻은 자로서 나는 페이스북의 긍정적 요소를 높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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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글 밑에 '좋아요'를 누른다는 것이 참으로 낯간지러웠다. 좋아야 '좋다'라 할 일이지 감흥이 일지 않는 글에 좋아요 맞장구를 치는 것이 의뭉스러운 짓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생각을 달리했다. 그것은 스쳐 지나는 이에 보내는 목례이고 미소다. 그 가벼운 동작이 대상에 대한 인정과 지지로 여겨져 받는 이의 마음이 따뜻해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김대식의 말처럼 영장류가 서로 이를 잡아주는 행위를 통해 소통과 공감의 신호를 주고받듯이 내가 다가서 그의 곤한 등을 쓸어주고 이를 잡아주면 그 또한 '좋아요'를 응답하는 것이다. 상호성이 없는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한 '친구'가 될 수 없음은 '페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나는 그의 이를 얼마나 잡아줬나를 생각하며 새해를 시작한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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