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반데기 전망대 돌담은 누가 쌓았을까

청량산

청량산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다. 가을 끝의 청량산은 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오게 했다.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산의 모양새 하며 온통 울긋불긋 단풍으로 치장한 모습이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경사가 급한 산 아래 자락에는 안동댐으로 흘러드는 낙동강이 흐른다. 강폭은 좁고 물은 푸르고 맑다. 물속에서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움직인다면 유리 바닥 아래를 보고 있는 것처럼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았다. 순간 낚시 생각이 났다.

나는 예전에 루어낚시를 즐겼다. 바늘에 고무로 된 가짜 미끼를 끼어서 가물치, 쏘가리, 꺽지, 베스 같은 육식성 물고기가 그 미끼를 물어 끌려오도록 하는 낚시다. 낚시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지만 사기다. 루어낚시는 성질 급한 육식성 물고기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지렁이나 올챙이처럼 생긴 고무 미끼를 물속 바위 아래서 잘 놀고 있는 쏘가리 앞에 던져서 줄을 살살 당기면 쏘가리가 그 미끼를 따라오다가 어느 순간 덥석 물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기'가 참 재미있다. 덩치 큰 물고기가 미끼를 물고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칠 때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그 줄을 통해 물고기를 몸부림이 고스란히 손끝으로 전해진다. 진동이다. 그 '진동'이 짜릿하다. 나는 가능하면 '어린이'는 낚시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낚시의 짜릿한 손맛에 빠지면 하던 일과 집안일을 등한시하게 된다. 하물며 어른도 그런데 사리분별력이 약한 어린이는 오죽하겠는가? 낚시 손맛을 본 초등학생이 학교만 마치면 낚시대를 들고 버스 타 바닷가를 찾아가더라는 말을 누구에겐가 들은 적이 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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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안반데기 경작지와 풍력발전기. 왼쪽 길에 있는 사람을 보면 풍력발전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간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 조재영 기자

 

지금은 거의 낚시를 하지 않는다. 흥미를 잃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한참 낚시에 재미를 들였다가 어느 순간 나를 되돌아봤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재미가 좀 있는 것 말고는 별 의미가 없었다. 세상 일이 모두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물고기 회를 즐겨 먹거나 매운탕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걸 잡아서 돈을 벌 것도 아니고 두어 마리 낚았다가 그냥 살려줄 텐데 내 손맛을 위해 물고기들을 괴롭히고 물을 흐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전부터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는 것은 어떤 일이든 탐탁지 않았다. 조금 과장하면 길을 잃고 집 안으로 들어온 잠자리나 벌 같은 곤충도 제 발로 구멍을 찾아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리거나, 아니면 창문을 열어서 밖으로 내보낸다. 집 문밖에 거미가 줄을 쳤더라도 줄만 걷어낼 뿐 거미는 내버려 둔다. 물론 파리나 모기는 예외다.

우리 일행은 창녕, 고령, 성주, 의성, 안동을 거쳐 강원도 강릉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주로 5번 국도를 타고 가다 안동에서 35번 국도로 갈아탔다. 안동호를 따라가던 길이 우리를 청량산 앞으로 데려다주었고 나는 처음으로 청량산을 봤다. 아마 이전에 다른 계절에 한 번쯤은 이 앞을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을 단풍을 둘러쓴 청량산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에 가을에 청량산을 봤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 그만큼 가을 청량산은 인상적이었다.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깝다. 도로를 따라 산모롱이를 돌자 청량산이 갑자기 나타났고,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나는 헬멧 속에서 입을 헤벌린 체 청량산을 보면서 달렸다. 속도가 약간 느려지긴 했지만 곧 청량산은 백미러에서도 사라졌다. 내년이든, 그다음 해이든 꼭 오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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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 구문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출발할 때 일행이 찍어 준 내 모습. / 조재영 기자

 

길은 봉화를 거쳐 강원도 태백으로 이어졌다. 봉화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길은 여전히 공사 중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여전히'는 대략 10년 정도를 말한다. 과거에도 이 길을 여러 번 지나다녔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은 없고, 길은 넓히고 선형을 직선화하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더라는 얘기다. 아마 10년 후에도 이 길은 '여전히' 공사 중일지도 모르겠다.

태백으로 들어섰다. 탄광으로 일어섰던 도시는 탄광이 소멸하면서 그 활력도 함께 소멸한 듯했다. 곳곳에 광부들의 사택으로 쓰였을 법한 작은 아파트가 버려져 있었다. 작은 바위산을 뚫어 길은 낸 도로가 기억에 남는다. 그 바로 옆이 구문소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는데 산을 넘은 강이 있다. 바로 구문소다.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황지천이 하류로 흘러가다 이곳에서 석회암 바위산에 가로막히자 아래쪽을 뚫어버린 것이다.

안반데기와 고루포기

35번 국도를 타고 가다 강릉으로 들어서면서 410번, 415번 도로로 갈아타고 안반데기로 향했다. 그곳은 안반데기와 고루포기라는 고랭지채소 재배지가 잇닿아 있는 곳이다. 높은 곳은 해발 1100에 이른다. 위성 사진으로 보면 남북으로 길쭉한 지형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길이가 수 km에 이른다. 고도가 높고 서늘한 지역이어서 안개, 비, 바람, 구름이 많고 맑은 날이 많지 않다고 한다. 엄청나게 넓은 경사면을 경작지로 일궈놓았다. 그리고 산 정상 능선을 따라 대형 풍력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바람이 세게 불지 않는 것 같은데도 발전기의 거대한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었다.

안반데기와 고루포기를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에 올랐다. 전망대에서 보는 안반데기와 고루포기의 일부는 파랬고 일부는 황톳빛이었다. 파란 곳은 무엇인가 작물이 자라고 있는 땅이었고 황톳빛인 곳은 심겨 있던 작물을 수확하고 나서 갈아엎은 곳이었다. 아마도 김장용 배추 무우를 수확했으리라. 능선을 따라 드러나는 곡선과 그 곡선을 따라 우뚝 서 있는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전망대에서 동쪽을 보면 멀리 강릉 시가지와 동해 바다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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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반데기 전망대에서 동쪽을 보면 멀리 강릉 시가지와 동해바다가 보인다. / 조재영 기자

 

전망대 이름이 '멍에'였다. 멍에는 소를 앞세워 쟁기질할 때 소 어깨에 채우는, 나무로 만든 기구다. 전망대라고 해봐야 작은 비석과 조그만 정자 하나가 전부다. 나는 그곳에 올랐을 때 내 부모님을 떠올렸다. 전망대를 둘러싼 담장 때문이었다. 전망대 담장은 산비탈을 경작지로 개간할 때 나온 돌을 쌓아 올린 돌담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이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논이 경지정리지구에 포함됐다. 경지정리는 불도저를 앞세운 토목공사업자들이 한다. 그들은 삐뚤빼뚤 어지럽게 생겨 먹은 논두렁을 싹 밀어내고 바둑판처럼 일정 크기의 논 형태로 만들고 그 가운데로 곧은 길을 낸다. 그리고 길 양쪽 혹은 한쪽으로 수로를 만든다. 그들의 일은 거기까지다. 나머지는 논 주인이 해야 한다. 나머지 일 중 힘든 일이 돌을 주워내 다른 곳에 갖다버리는 일이다. 드러나 있거나 흙 속에 묻혀 있는 돌을 모조리 찾아내고 그것들을 논 여기저기에 모은다. 돌이 모이면 다시 그것을 리어카나 경운기에 싣고 가서 버려야 한다. 돌을 주워내지 않으면 농기계로 논을 갈아엎을 때 농기계가 망가진다. 그래서 이 작업은 필수적이다. 필수적인 일은 필수적으로 고된 노동을 동반한다. 그 노동은 오래 지속한다. 부모님은 열 마지기가 넘는 논에서 똑같은 작업을 오랫동안 반복해야 했다. 아마도 부모님께는 우리 여섯 남매 형제들이 '멍에'였을지도 모른다. 여든 중반인 부모님께 치매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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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루포기 쪽에서 본 안반데기 풍경이다. 이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 조재영 기자

 

설악산

하룻밤을 묵을 장소는 설악산 자락에 있는 콘도였다. 강릉에서 속초를 거쳐 고성까지 달렸다. 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졌다. 콘도 뒤쪽 설악산 자락에 거대한 울산바위가 딱 버티고 있었다. 콘도에 짐을 풀고 수도권에서 오신 형님·동생들과 마주 앉았다. 모두 '이륜차타고세계여행' 카페를 통해 인연을 맺은 분들이다. 카페 매니저 폴로 형님도 모셨다. 우리가 초대한 것이다. 나도 직접 모터사이클 클럽을 창단해서 운영을 해봤지만 서로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일을 진행하고 모임을 이끌어가기란 참으로 힘들고 피곤하다. 하물며 한 지역도 아니고 전국을 대상으로 한 모임이라면, 그리고 그 회원 한 명 한 명이 이른바 '똘끼 충만'한 사람들이라면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운영진의 수고가 얼마나 많을지 알만할 것이다.

겨울 별미인 대방어 회를 먹기로 사전에 약속했었다. 먼저 도착한 수도권 팀이 속초항에서 동해산 대방어를 장만해왔고 우리는 일행 중 한 명이 달려가서 아바이순대를 배불리 먹을 만큼 사 왔다. 나는 식사 전후에 드립 커피를 맛볼 수 있도록 넉넉히 준비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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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도에서 본 속초 앞 동해 일출. 창문이 모두 잠겨있어 선명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 조재영 기자

 

식탁은 대방어 회와 아바이순대, 그리고 술로 풍성했다. 자정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국내에서 국외를 넘나들었고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경계를 두지 않고 왔다 갔다 했다. 콘도는 2채를 빌렸고 한 채에는 코를 많이 고는 사람, 다른 한 채에는 코를 골지 않는 사람들이 잠을 잤다. 서로에 대한 작은 배려였다. 덕분에 잠자리가 무척 예민한 나는 '무사히'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뜬눈으로 밤을 세워야 했으리라.

다음 날 우리는 동해에서 해가 솟아오르기 전에 잠에 깼다.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출을 보았다. 안타깝게도 콘도 관리자들이 모든 창문을 열 수 없게 만들어 놓아서 창유리와 방충망 너머로 일출을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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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모터사이클 형제들. 모두 '이륜차타고세계여행' 카페 회원들이다. / 조재영 기자

 

간단하게 아침을 해먹은 우리는 필례약수터에 들렀다가 홍천으로 가서 화로구이 고기를 먹고 남쪽으로 가기로 했다. 콘도 앞에서 56번 국도를 타게 되면 바로 미시령을 넘게 되는데 우리는 미시령을 넘지 않고 좀 더 남쪽으로 가서 한계령 쪽으로 설악산을 넘기로 했다. 양양에서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으로 올랐다. 한계령 오르는 길은 지리산 성삼재나 오도재 오르는 길과는 완전히 다른 맛이 있었다. 꼬불꼬불한 길은 비슷하지만 주변 풍경이 달랐다. 날카롭게 솟은 바위산에 소나무가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는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고도가 높아지고 길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열두 폭 수묵화 속 풍경을 실물로 재현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지리산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야 설악산도 있음을 알게 됐다. 내가 아는 수도권 라이더들은 지리산을 달려보고 감탄을 했었는데, 나는 설악산을 달려보고 감탄했다. 언제든 달리기 좋은 시기에 꼭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설악산도 청량산과 마찬가지로 사진으로 담지 못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었기 때문에 모터사이클을 세울 틈이 없었다.

우리는 한계령휴게소에 닿기 바로 직전에 왼쪽 샛길로 빠져서 필례약수터에 닿았다. 이 길은 인제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지름길이다. 필례약수터는 설악산 내 관광지치고는 아주 조용한 곳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간단하게 고사를 지냈다. 새로 모터사이클을 장만한 후배를 위해, 그리고 가끔씩 자잘한 사고를 겪는 우리 각자를 위해 고사를 지냈다. 무사하게, 즐겁게 달릴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설악산신께 기도했다. 그리고 이분들과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인제에서 홍천까지는 44번 국도로 이어져 있는데 4차로 대로가 뻥 뚫려 있어 시원하게 달렸다. 꽤 먼 거리였다. 홍천 화로구이 음식점에서 돼지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맛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번호표를 받아 오랫동안 대기해야 할 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대기하는 손님이 넘쳐났다. 식사를 마치고 수도권 형제들과 헤어졌다. 수도권 형제들은 서쪽으로, 우리는 남쪽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하고서 확인한 이번 1박 2일 여행거리는 1000km를 조금 넘었다. 네게 이런 취미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고 행복하다고 느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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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필례약수터 주차장에서 고사를 지냈다. 야마하 슈퍼테네레를 새로 장만한 후배가 설악산신께 술을 올리고 있다. / 조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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