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의 80세 생일을 맞이해서 1956년 8월 15일 만수무강을 비는 헌수송(獻壽頌)을 썼고,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을 때는 그 슬픔을 담아 묘비문을 쓴 노산 이은상은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위령탑 비문도 썼다. 권력자 뿐만아니라 억울한 피해자를 위해서도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이 사건은 알게 모르게 거창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성년이 된 자식의 사회생활을 위해서 부모들이 교훈이라고 들려주는 말에는 항상 낯선 도시나 직장에서는 항상 말조심, 입조심 하라고 자식에게 잔소리하였다.

시인 신철규는 시 '꽃 피네, 꽃이 피네'에서 '… 니는 대처로 나가 살아야 한 대이, 가서는 총도 잡지 말고 펜대도 굴리지 말고 참꽃 맬로 또랑또랑 살거라이, 나서지도 숨지도 말고, 눈을 부릅뜨지도 감지도 말고, 꽃이 피인 기라, 피가 꽃인 기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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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이 쓴 박산골 위령비문의 현재 모습. 절반이 땅에 묻혀 있다.

지난 5월 28일 창원을 출발하였다. 산청IC에서 거창군 신원면까지의 산길은 엄청 꼬불꼬불하였다. 오지 중에서도 오지였다.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던 곳이다.

거창사건추모공원은 2004년도에 4만 9000여 평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6·25전쟁 중인 1951년 2월 9일~11일 사이에 견벽청야라는 작전에 의해 세 차례에 걸쳐 국군에 의해 학살된 719명의 영령을 추모하는 공원이다. 당시 군의 작전방침이었던 견벽청야(堅壁淸野)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성은 견고하게 지키되 포기해야 할 곳은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정리하여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 버리는 전법이었다. 일종의 초토화 전법이다. 이에 따라 연대 지휘관 회의에서 시달된 작전명령에는 다음과 같은 지침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한다. △공비(빨치산)들의 근거지가 되는 건물은 전부 소각하라.

하늘로 인도한다는 천유문(天羑門)을 지나서 위령탑으로 갔다. 탑 뒤편에는 2003년 6월 '거창사건 위령탑 건립에 부쳐'라는 표성흠의 시가 새겨져 있었다. '기억하라'로 시작하여 '무언가 생각들을 좀 해 보시라'로 끝맺는 시이다. 표성흠은 이곳에 묻힌 이들은 잘못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두 번 죽었던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시인 이경재에 의하면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 시의 일부 내용에 대해 유족들의 항의가 있어서 담당 공무원의 입장이 난처했다고 한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노산의 비문은 없었다. 추모비의 두 번 죽었다는 표현도 궁금하였다. 발걸음을 역사교육관으로 옮겼다. 입구에 들어서니 5·16 군사정부에 의해 부서진 위령비 모형이 전시되어 있고 벽에는 노산이 쓴 박산위령비문이 크게 붙어 있었다. 세 번째 학살에서 죽은 517명을 위한 비문이다.

1951년 1월 6일(음력)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과정리에 천인공노할 비참한 사실이 있었다. 저 6·25동란에 공산군의 남침으로 피를 흘린 것만도 겨레의 역사 위에 뼈저린 자취를 남긴 일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일부 미련한 국군의 손에 의하여 죄없는 양민들이 집단살육을 당했음이랴. 당시 국회의원 신중목 씨의 발의로 국회조사단의 손에 의하여 그 사실이 천하에 발표된 채 남은 친족과 동료들의 통곡 속에서 어느덧 3년 세월이 지나가 마침내 희생자들도 그 얼굴조차 분간할 길이 없어져 1954년 3월 3일 다만 남자 여자 소아만을 구별하여 새 무덤에 안장하니 남자 109명, 여자 183명, 소아 225명 합하여 517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났건만 고을 동포들은 쓰라린 기억을 잊지 못하고 한덩이 묘비를 세워 그립고 애통하는 정을 표하고자 하므로 이제 간절한 뜻을 받들어 붓을 들었건만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은 것이라 차마 무슨 말로 뒷세상에 기록을 남기겠느냐. 다만 여기 손을 씻고 혼들의 명복을 빌며 후세 자손들에게 부디 정의와 동포애를 지키라고 경고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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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글자가 훼손돼 있는 위령비 뒷면(왼쪽). 노산이 쓴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오른쪽)

노산은 이 비문에서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천인공노할 비참한 사실'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차마 무슨 말로 기록을 남기겠느냐'고 당혹해하면서 '다만 후세 자손들에게 정의와 동포애를 지키라고 경고할 따름'이라고 하였다. 5·16 후에 이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라는 부분 때문에 위령비가 땅속에 파묻히고 말았다고 한다.

교육관 전시물을 설명해주는 문화해설사에게 실제 위령탑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해설사는 맞은편 산 아래를 가리키면서 도로변에 있다고 하였다. 추모공원 밖이었다. 신원천 다리를 건너서 국도를 따라 조금 걸으니 정자와 위령탑, 2개의 묘와 비스듬히 누운 위령비가 나란히 있었다.

거창군은 1950년 7월 29일, 인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9월 27일 국군이 거창읍에 있는 경찰서를 수복하였다. 그런데 이 지역 산악에 근거지를 둔 빨치산이 다시 거창지역을 장악했다. 다음 해인 1951년 2월이 되어서야 국군은 거창, 함양, 산청지역을 다시 장악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2월 5일 신원면 지역으로 진입했다가 산청 쪽으로 이동했다. 이틀 후인 2월 7일, 빨치산이 다시 내려와 신원면 지서를 공격하여 1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설날을 막 지낸 날이었다. 같은 날인 2월 7일,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는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 작전을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손곡리, 지곡리 서주리마을 주민 705명을 공비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하였다.

신원면지서 공격소식을 듣고 곧바로 이틀간 행군을 한 3대대는 다시 신원면으로 돌아와서 마을 주민 중에 빨치산과 내통하는 세력이 있다고 단정하고 견벽청야(堅璧淸野)작전을 실시하였다.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 10일 대현리 탄량골,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세 차례에 걸쳐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 359명, 16세에서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의 무고한 양민 719명을 무지막지하게 죽이고 처참한 시신 위에 나무와 기름을 뿌려 태워버리기까지 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렀다. 후환이 두려운 대대장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현장에서 약 2km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한 것으로 위장하였다. 한동석은 이미 산청, 함양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하고 왔다.

사건이 난 지 두 달이 지난 4월 1일, 국회 조사단이 구성되었는데 그 다음 날 계엄사령부의 김종원 민사부장은 자체적으로 공명정대하게 할 것이니 군을 모욕하는 모략에 속지 말라는 협박조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일주일 뒤인 4월 7일 합동진상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가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조사를 못 하고 되돌아가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4일 통비분자 187명을 적법절차에 의해 처형했을 뿐이라고 공식발표까지 했다. 명백한 허위였다. 영국의 한 언론이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쓰레기장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고 쓴 것도 이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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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2월 10일 두 번째 학살이 자행된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의 학살 현장 보존비.

결국 사건은 축소된 채로 오익균 대령(9연대장), 한동석 소령(3대대장), 이종대 소위(정보장교), 김종원 대령(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등 4명이 구속되어 재판받았으나 1년 만에 이승만 정권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김종원은 1952년 3월에, 오익경은 9월에, 한동석은 1년 6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그 후 김종원은 이승만 정부에서 경찰 간부에 특채되었고, 오익경과 한동석은 군에 복직하여 승진하였고 국방장관 신성모는 주일대사가 되었다.

사건이 난 지 3년이 지난 1954년 4월 7일에야 비로소 큰 뼈, 중간 뼈, 작은 뼈들 끼리 모아서 남자, 여자, 소아로 구분하여 3개의 박산골 합동묘에 안장하였다. 애초에 불태웠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의 새 세상을 맞아서 4·19 한 달 후인 5월 25일 유족들은 변영재 신원면장과 김희주 면의회 의장과 함께 진상규명과 위령비를 세워달라는 호소를 하였고 유족회와 묘비건립추진위원회도 구성하였다.

제4대 국회에서 박상길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1960년 5월 23일 구성된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진상재조사위원회의 1개월 활동을 통하여 1960년 6월에야 비로소 정확한 숫자 719명이 확인되었다. 박산골은 먼저 남자 합동지묘 109위, 여자 합동지묘 183위와 함께 아이들 유골 225위는 봉분도 없이 '소아합동지묘(小兒合同之地)'라는 표시만 하고서 노산 이은상의 추모 시를 새긴 위령비 제막식을 11월 18일에 했다.

시인 김태수는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시집 <한맺힌 피울음>(1990), <황토마당의 집>(실천문학)에 장시 게재한 바 있다. 1986년 마산 월성초등학교(완월동)에 근무할 때 경남대학교 학보사 기자들과 함께 여러 번 신원면 주민 증언을 채록하여 학보에 게재했고 마산에 3년 정도 거주했다. 또한 본격적 조사를 위해 87년 거창 완대, 쌍봉초등학교 근무하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신중목의 청에 의해 노산이 썼다고 하는데 나중에 문제가 되자 한사코 자신이 쓰지 않았다고 발뺌을 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남도일보의 기사에서도 발뺌했다고 한다. 이 당시 남도일보에는 시인 정규화가 근무하고 있었다 하여튼 이 비를 위해 신도성 경남지사가 위령비 건립비용으로 도비 50만 원을 지원하였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군부에서는 유족회의 주장에 부정적인 분위기였다. 특히 이종찬 국방장관은 "이 정권 시대의 법도 법이다. 요사이 군과 관련된 거창사건 등의 재심(再審)을 주장하는데 법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4·19 이후 군대를 신경 쓰게 만든 것은 전국적으로 번진 양민학살 폭로 시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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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주범을 처벌하라는 거창군민들의 시위.

노산이 위령비문을 쓴 지 6개월 후 1961년 5·16 군사정부는 쿠데타 이틀 만인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구속시켰다.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희생자 517위를 합장해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명령을 내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은 파헤쳐졌다. 계엄당국은 희생자 명단을 내놓고 삽으로 유골을 떠서 유족들에게 뼛가루와 흙 한 줌을 강제 분배하였다. 유족들이 통곡하며 수령을 거부하자 군경은 총칼로 협박하여 다 가져가게 만들었다.

구속된 유족회 간부들을 석방시켜 준다는 약속을 받고서 조부, 조모, 부모, 형제, 자매의 유골을 대신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개장하라는 요구도 받아들였다. 노산이 쓴 위령비문 409자는 군인들이 유족을 시켜서(시인 김태수, 이경재의 증언) 글자 한 자 한 자를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어버리는 일을 저질렀다. 글씨는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고인을 두 번 죽인 것이다. 노산은 자기가 쓴 비문이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 당시 제주도에서는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도 똑같은 변을 당하였다.

마산지역 시인 이선관은 그의 시 '백조일손지지'에서 '이 땅 제주에서 무덤이 발굴되었습니다 / 제주뿐이겠습니까 / 충북 영동에도 경북 문경에도 / 경남 산청 함양 거창에도 / 지구촌에는 나라들이 많습니다만 /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또 부끄러워라'고 했다.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1967년 8월 20일에야 비로소 파헤쳐진 묘역을 겨우 비바람이나 피할 수 있도록 복구하여 남, 여 묘소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땅 속에 파묻힌 지 27년만인 1988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2월 15일 위령추진위원회를 발족하고서야 비로소 위령비를 파내었다. 그러나 완전히 파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후대에게 제대로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쓰러진 위령비의 3분의 1이 땅에 묻힌 현장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그 옆에는 2007년 4월 27일에 새로 세운 위령비가 있는데 파묻힌 비와 똑같이 만들어 거북이 등에 세웠다. 앞면(碑陽)에는 세로로 위령비(慰靈碑), 뒷면(碑陰)에는 노산의 비문이 깨끗하게 새겨져 있다. 내용을 비교해보니 역사교육관에는 '집단학살'이라고 되어있는 부분이 이곳에서는 '집단살육'이라고 되어 있었다. 옆면에는 박산위령비 내력문이 적혀 있다. 파묻힌 위령비 대신에 1995년 12월 8일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된 후에 재건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새 위령비 옆에는 1960년 11월 18일의 합동위령식장에서 유족들이 낭독한 추도사가 적힌 돌이 세워져 있다.

노산은 1960년 9월에 위령비문을 썼는데 3년 후인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창당 선언문 초안을 썼다. 자신이 쓴 비문을 땅에 파묻은 군사정부가 민정이양의 약속을 어기고 제3공화국이 되기 위해 만든 정당의 창당선언문이다. 정신이 없는 분인 것 같다. 같은 해에 거창유족회 회장 직무대리인 문병현 회장은 한탄시(恨嘆詩)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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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3년에 열린 민주공화당 창당대회 사진.

春來僻鄕野花芳(춘래벽향야화방)

: 고향에 봄이 오면 꽃은 다시 만발인데

愛我父母別絶縱(애아부모별절종)

: 나를 사랑하던 부모님 헤어진 후 소식이 없네

五百餘魂繞二墳(오백여혼요이분)

: 오백이 넘는 영혼 두 무덤을 맴도는데

慰靈碑何地下藏(위령비하지하장)

: 위령비는 어찌하여 땅속에 묻혔을까

嗟呼男與女之墓(차호남여여지묘)

: 오호라 슬프도다 남자와 여자 무덤

淚沾草茅洗血靑(누첨초모세혈청)

: 눈물에 젖은 잔디 피를 씻고 푸르렀네

其石復元事未了(기석복원사미요)

: 그 비석 세울 때는 언제나 올 것인지

寤寐不忘獨斷腸(오매불망독단장)

: 자나 깨나 애태우니 간장만 타는구나

노산이 쓴 비문과 비교해보면 글쓴이가 다르고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다르긴 하지만 진정성이 있는 글이 어느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거창문학축전추진위원회, <한껏 아름다운 날들>, 도서출판 두엄(2011년), 55쪽

- 김민철 외 3인,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현대사>, 내일을 여는 책(2017년), 168쪽

- 김태수, <환장노래의 현장, 신원면을 찾아>, 54쪽, <2013년도 찾아가는 문화활동 거창>, 경남작가회의(2013년)

- 홍석률, <민주주의 잔혹사>, 창비(2017년), 231쪽

- 김민철 외 3인, <솔직하고 발칙한 한국현대사>, 내일을 여는 책(2017년), 167쪽

- 김태수, <환장노래의 현장, 신원면을 찾아>, 54쪽, 경남작가회의, <2013년도 찾아가는 문화활동 거창>, 2013년(1988년 카톨릭신문사 발행, 월간 빛에 수록)

- 남도일보 1989년 4월 14일, 거창의 비극 18, 묘비에 얽힌 사연, <거창양민학살사건자료집 4권>, 한인섭편, 서울대학교 법학연구소(2007년), 158쪽, 이 당시 남도일보에는 시인 정규화가 근무하고 있었다

-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혁명전야>, 조선일보사(1998년), 219쪽

- 한홍구, <대한민국史 1권>, 한겨레출판(2006년), 38쪽

- 서중석, <서중석의 현대사이야기 2권>, 도서출판 오월의 봄(2015년), 238쪽

- 배대화, 우무석,<이선관 시전집>, 불휘미디어(2015년), 600쪽

- 文秉鉉, 1961~1980년, 거창유족회 제4대 회장 직무대리, 1980~1995년 거창사건희생자위령추진위원회 회장, 1995~1997년 거창사건양민학살희생자유족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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