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분권이다'
고유한 정체성 중심에 놓고 묵묵히 걸어 나가
수도권 편중된 문화서 벗어나 자생의 싹 틔워
펄북스·피플파워·대학들
'삶' 중심 콘텐츠 생산
지역 역사·환경도 재조명'
자발적인 독서모임 '활발'
관 주도 하향식 운영 탈피
문화 형성 '원동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모든 분야의 역량과 투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 쏠려 있다. 문화 또한 예외가 아니다.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한 지원과 도서관, 박물관, 공연장 등 문화기반시설 역시 수도권에 편중됐다.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중앙에서 지방 곳곳으로 '내려보내는' 예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 한 편, 화가가 여는 개인전 역시 예산과 권한이 모인 중앙 '덕'에 기획될 수 있다. 그런데 출판은 이와 다른 행보를 보인다. '지역'이라는 정체성을 중심에 놓고 각자 힘대로 오롯이 나아가고 있다. 몇 해 전부터 경남과 부산, 대구, 제주 등을 중심으로 자생적으로 싹을 틔우고 있다. 각자 나아가는 방향과 색깔이 저마다 다른 지역 출판은 문화 분권의 좋은 예다. 앞으로 경남을 중심으로 출판·유통을 넘어선 독립출판사의 성과를 짚고 문화 분권으로 잘 엮일 지역 출판의 미래와 가능성을 들여다본다.

◇'지역'에서 길을 찾다 = 경남에 뿌리를 내린 출판사 가운데 최근 2년간 지역의 고유한 전통과 문화를 살리는 의미 있는 작업을 살펴봤다.

지역 서점을 기반으로 한 출판사 '펄북스'는 진주에서 30년간 토박이 책방으로 자리 잡은 진주문고가 모체다. 도서관, 서점, 출판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책을 내고 있다. 지역 출판사라는 정체성은 진주를 소재로 한 '진주의 빛' 시리즈에서 찾을 수 있다.

진주마하어린이도서관 어머니모임 회원들이 만든 그림책 <유등, 남강에 흐르는 빛>은 유등을 주제로 2차 진주성 싸움을 배경으로 녹였다. '진주의 빛' 시리즈 이름으로 나온 첫 번째 책이다. 이어 한국 차 문화 운동의 발상지인 진주에서 차 문화 운동의 역사를 조명한 <맑은 차 한 잔>과 <바람 부는 차실>을 출간했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숨은 필자도 발굴했다. '지리산 시인'이라 불리는 박남준 시인의 <중독자>를 시작으로 박노정 시인의 <운주사>와 조문환의 <바람의 지문>, 지난해 12월 출간한 <그래도 사는 건 좋은 거라고>까지 총 4권의 시집을 펴냈다. 모두 '펄북스 시선' 시리즈로 엮었다. 시집 표지는 지역 화가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통한 미술 작품으로 장식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 밖에도 지역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책이 독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진주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진주를 소개하는 여행에세이, 소소책방 운영자가 풀어 놓는 헌책방에 관한 이야기 등을 책으로 내놓을 계획이다. 지역 출판사가 만들었기에 잘 팔릴 수 있는 책을 찾기 위한 펄북스의 노력은 새해에도 계속된다.

경남도민일보의 '도서출판 피플파워'는 스토리텔링 중심의 콘텐츠를 제작한다.

지역의 산, 강, 유적, 풍습, 토박이말, 음식, 전통시장 등을 이야기로 엮어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고 정신문화를 살찌운다는 복안이다.

경남의 역사·문화·관광 스토리텔링 <경남의 재발견> 출간을 시작으로, 경남 먹거리 특산물 스토리텔링 <맛있는 경남>, 경남의 자산 스토리텔링 <한국 속 경남>까지 공익콘텐츠를 연달아 발간했다. 발품으로 찾은 우리 고장 이야기 <경남의 숨은 매력>, 500리 물길 따라 만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사람 이야기 <남강오백리 물길여행>을 이어서 내놨다.

최근에는 통영~한양을 이은 조선 고속도로 <통영로>와 행복한 공동체를 만드는 담론 <시민을 위한 도시 스토리텔링>, 이야기가 있는 느린 풍경 <남해 바래길>을 펴냈다.

지역 출판이 없으면 지역 콘텐츠가 생산되지 않으며, 지역 콘텐츠가 없으면 지역의 역사와 문화도 사라진다는 기조에 부합해 지역 출판사가 아니면 나오지 못할 책들을 꾸준히 엮을 예정이다.

도시에서 출판 일을 하다가 하동으로 귀농한 부부가 문을 연 상추쌈 출판사는 작은 마을 한 가운데서 지역 삶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풀어 놓는다. 거창하고 새로운 것보다는 지역에서 오랫동안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중점적으로 담아내겠다는 취지다.

지난해 말 펴낸 두 권의 책은 상추쌈 출판이 지닌 철학과 맞닿아 있다.

지리산 산골에서 나는 제철 재료로 이유식을 만드는 비법을 담아 <에코맘의 산골 이유식>이란 책을 출간했다. 저자는 아기 아빠이자 하동에 자리한 '에코맘의 산골 이유식' 업체 대표다. 지난 6년간 고향인 시골에서 직접 텃밭을 가꾸고 마을 어른들 이야기를 모았다.

밀양에서 태어난 박선미 작가가 어린 시절을 되짚어 <언젠가 새촙던 봄날>이란 제목으로 이야기를 길어 올렸다. 이를 기점으로 상추쌈 출판사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머물고만 있는 기억을 꺼내 <이야기는 맛있다> 시리즈로 선보일 생각이다.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을 잇는 글은 <여우 빛이 될 때까지(가제)>, <엄마도 예쁘다(가제)>라는 이름으로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다.

◇대학 출판부도 지역 콘텐츠 창작소 = 대학 내 출판은 출판부, 언론출판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대학의 부속기관 또는 별도 기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도내에는 경상대, 경남대, 창원대, 한국국제대 출판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서 학술·교육 관련 전문적인 총서나 자료집을 발간하는 경우가 다수다. 지역 콘텐츠를 개발하거나 기획한 사례는 드물다.

그런 점에서 '지앤유 로컬북스'라는 별도 브랜드를 통해 지역 관련 책을 출간하고 있는 경상대 출판부는 단연 돋보인다. 2013년부터 경남의 자연, 환경, 인물, 역사 등 지역 콘텐츠를 소재로 한 도서 출판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총 3권을 발간했다.

전병철 한문학과 교수가 번역·출간한 김선신의 <두류전지>가 그것이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바라본 지리산의 자연지리와 명승지, 문화유산, 문학작품, 일화 등을 총망라한 인문지리서다. 정계준 생물교육과 교수가 경남과 부산지역 노거수와 마을 숲을 찾아다니며 그 특징과 가치를 살핀 <노거수와 마을숲>,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인 담정 김려의 <우해이어보>를 새롭게 해석한 <최초의 물고기 이야기-신우해이어보>를 잇따라 냈다.

이전에는 조선 선비들이 다녀간 거창군 일대를 소개한 <조선선비들의 답사일번지>, 역사 속에 소외됐던 지역 여성의 삶을 담은 <나는 대한민국 경남여성>을 발간한 바 있다.

경상대 출판부는 앞으로도 지역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할 계획이다. 지역에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을 각인시키는 게 목표다.

◇문화 자생력 키우는 지역민 = 책이 나오기까지 대개 출판사가 콘텐츠를 발굴하거나 지역 저자를 찾아내는 과정을 통해 출판이란 결실을 맺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지역민이 주도적으로 책을 기획하고 편집·제작한 사례가 있어 눈길을 끈다.

통영 지역 독서모임인 '산책'은 지난해 봄부터 계간지를 펴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활동을 기록하고 저장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소식지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함께 나누고 싶은 생각과 전하고 싶은 글을 주제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게 표현했다.

소식지는 여행기, 모임 후기, 독후감, 통영 동호회 소식, 전시회 후기 등 자유롭게 쓴 글로 채워졌다.

지난해 12월 창원에서는 <서랍>이라는 문집이 나왔다.

온라인 독서모임 '독서클럽창원'이 주체다. 온라인 카페가 한 번 폐쇄됐던 것을 계기로 휘발성이 강한 인터넷 공간을 종이에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온라인 카페 글을 중심으로 독서클럽 역사와 회원 인터뷰, 기획 글을 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을 엮었다. 어찌 보면 사소하고 작은 일이다. 그에 비해 지니는 가치는 크다. 주민 스스로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작업은 지역에서 문화 자생력을 키우는 토대를 쌓는 것과 같다. 이는 관 주도 하향식 운영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지역 문화를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