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누빈 대우의 정신 청년들에게 전하고 싶다"

사천 출신의 박창욱(58)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사무총장은 경남을 비롯해 전국 곳곳을 누비는 '직업교육 전문가'다. 박 총장은 "대기업·중소기업·공적 영역에서 두루 일한 경험과 삼천포라는 성장 환경, '촌놈' 기질 등이 경계 없이 움직이는 지금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다"며 "경남 사람은 기질적으로 끈기, 의리 이런 게 강하다. 뭔가 마음먹으면 변치 않는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교직 그만두고 입사한 대우

Q. 사천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출생지 등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1959년 삼천포 선구동에서 태어났습니다. 학교는 사천의 문선초등학교·제일중학교를 거쳐 진주고등학교를 나왔구요. 서울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78년 서울대 사범대학에 입학하면서입니다. 그리고 1982년 졸업과 함께 서울에서 교사 일을 했는데 두 달 만에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 ㈜대우 무역부문에 입사했습니다. 대우그룹과 인연의 시작이었죠."

Q. 교사 생활도 하셨군요. 왜 금방 그만두었나요.

"사범대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해 자연스럽게 국어교사가 된 건데 저와 잘 맞지 않았습니다. 지루하고 건조한 일보다는 좀 더 신나고 역동적인 일을 원했습니다. 어릴 때 학생회장을 하는 등 리더십도 있고 좀 남다른 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린 건 아니었습니다. 전 글로벌 비즈니스 한복판에서 국제무역을 하고 싶었으나 대우에서 인사부에 배치됐거든요. 사범대 출신이면서도 교사자격증이 없고 종합상사에 근무했으면서도 정작 해외 주재 경험이 없는 이력서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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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창욱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사무총장. / 고동우 기자

Q. 사천에 살지 않은 지 꽤 오래됐는데 여전히 사천에 사는 가족이 있나요?

"부모님은 오래전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50여 년 전, 어머니는 22년 전에요. 두 분 산소가 구암리에 있습니다. 제가 4남 1녀 중 막내인데 늦둥이거든요.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릴 적 참 가난하게 살았던 기억이 납니다. 동기들 사이에서 '가난의 대명사'였어요. 대학도 제가 직접 돈 벌어서 다녔죠. 현재 형님들과 누님은 삼천포를 포함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바로 위 형님이 얼마 전 삼천포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박기욱 선생님입니다. 매년 10월 모두가 삼천포에 모여 부모님 추도 예배를 드리고 있죠."

1999년 대우그룹 해체 억울한 부분 많아

Q. 대우그룹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했나요.

"입사해서 15년간 인사부, 경영기획부 등에서 일했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실무급 최고책임자로 근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1999년 대우는 해체당하게 되죠. 해체 후에는 아동 의류 회사에서 5년간 전문경영인으로 일하기도 했고 또 직업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지식가교를 창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대우 해체 10년째이자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9년에 대우그룹 출신 전직 임직원 조직으로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가 발족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여기서 사무총장 겸 전무로 일하고 있습니다."

Q.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대해 여쭙기 전에 대우라는 기업에 대해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잘 모르는 독자도 많을 거 같아서요. '대우 해체'라고 말씀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쉽게 말해 대우라는 회사는 그대로 두고 김우중 회장만 제거된 거죠. 물론 부채가 많은 일부 회사는 인수·합병되기도 했지만 대우중공업, 대우건설 등 대우 이름이 그대로 남은 회사도 많죠. 기업이 부실해서 해체했다는데 진짜 부실했으면 다 망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대우는 김우중 회장이 1967년 창업해 해체되기 전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라갔던 기업입니다. 해외시장 개척, 수출로 급성장했고 그로 인해 다른 부실한 회사를 떠맡으라는 요구가 많았습니다. 증권, 통신, 조선, 건설, 전자 등 참으로 다양한 영역에 뻗어 있었고 대우경영 모델을 배우려는 나라도 40~50개국에 달했습니다. 대우는 특히 다른 기업이 잘 안 가는 아프리카나 동남아, 동구 유럽국가를 집중공략했고 결과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미수교 국가와 수교, 올림픽 유치 등 나라를 위한 일에도 대우 역할이 컸습니다. 그렇게 대우 세계경영이 완성을 바라보는 시점에 외환위기가 닥쳤고 억울한 누명이 씌워져 해체를 당하게 됐죠. 당시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서 정부에 입바른 소리도 많이 했는데 그것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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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0월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한 행사에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가운데)과 함께. 맨 오른쪽이 박창욱 총장. / 박창욱 씨 제공

Q. 지금 근무하시는 대우세계경영연구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구체적으로 하는 일도 포함해서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직 대우 임직원들의 유일한 조직이자 공익법인입니다. 과거 대우 식구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기업을 키우고 대한민국 성장에 기여했던 경험을 의미 있게 남겨두자는 뜻에서 만들었습니다. 김우중 회장님 재기 관련 조직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전혀 아니에요. 저는 대우그룹 해체 당시에 모기업 실무책임자(경영기획부장 겸 비상대책실무위원장)로 일했던 인연으로 현재 연구회 회장인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이 사무를 챙기라고 해서 '의리' 때문에 일을 맡게 됐죠. 덕분에 김우중 회장님의 엄청난 '충성맨'으로 저를 쳐다보는 분이 많은데 싫지는 않습니다. 연구회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중소기업 수출을 돕는 역할과 대한민국 청년을 해외로 보내 세계 최고의 글로벌 비즈니스 전사로 만드는 것입니다. 후자가 김우중 회장님의 역점 사업이자 대우맨들의 염원이 담긴 것이죠. 매년 전국적으로 200여 명의 대학 졸업자를 선발해 동남아 4개국으로 보내고 있고 전원 1년 동안 합숙교육을 받습니다. 교육은 전부 무상으로 실시되며 전원 현지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취업하게 됩니다. 받는 연봉도 적게는 3만 불에서 많게는 5만 불 이상 되죠. 저는 이 모든 일의 실무 전체를 총괄합니다. 교육생 선발, 연수, 취업, 사후관리 등등이요. 지난 6년여 동안 800여 명을 양성했는데 5년 후면 2000여 명이 비즈니스 영역에서 서로 밀고 끌어주는 조직체가 됩니다. 설레는 일이에요. 유대교나 화교 네트워크 이상으로, 멋진 미래 조직체로 성장시켜보자는 비전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Q. 결국 대우그룹의 중심 노선·철학은 '세계경영'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 이게 다른 대기업과 특별한 차이가 있는 겁니까. 삼성·현대 등도 다 해외로 진출하고 있지 않습니까.

"차이가 있습니다. 대우 세계경영은 위험을 각오한 도전이었고 또 끈끈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우리는 리비아 건설사업에 참여했는데 그쪽은 돈이 없다고 했어요. 대우는 그래서 돈 대신 원유를 받아 인근 유럽국가 정유공장에 보내 그걸 또 팔았고, 그렇게 시장을 늘리고 현지 일자리를 창출했습니다. 다른 기업은 수지가 안 맞는다며 다 기피했는데 우리는 그렇게 높은 안목과 창조·개척 정신, 끈기로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직업 준비 돕는 '한국지식가교센터' 설립이 꿈

Q. 한국지식가교는 어떤 회사인가요? 대학 등에 강의도 많이 다니시는 것 같습니다.

"대우 시절 인사·조직 관리, 경영기획 업무 등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전문회사 한국지식가교를 창업했으니 당연히 강의가 주업이 됐습니다. 전국 대학 100여 곳, 기업 50여 곳을 다니며 다양한 주제로 강의를 합니다. 특히 요즘 핫이슈인 대학생들의 취업·창업 교육 비중이 높죠. 기업 등 일반조직에는 리더십, 창의력, 성과관리, 인문학 등을 주로 강의를 하고요. 굳이 나누면 연구회과 지식가교 일을 반반씩 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참고로 연구회는 활동비·교통비 정도만 받는 수준이고 돈벌이는 주로 강의로 합니다. 한창 벌 때는 한 해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했죠."

Q. 당연히 경남 쪽에도 많은 강연을 다니고 또 경남 사람도 많이 만날 것 같습니다.

"경남대에 취업준비 과목을 맡아 매주 목요일 갑니다. 경상대, 창원대 등도 자주 강의를 가고요. 또 모교인 진주고는 5년여 전부터 신입생 특강을 도맡아 하고 있고 진주 삼현여고, 중앙고 등에서 학생·학부모 대상 강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 사천·의령·합천도 특강 등 때문에 찾은 적이 있습니다. 뚜렷한 경계 없이 다양한 강의를 하는 건데 대기업·중소기업·공적 영역에서 두루 일한 경험과 삼천포라는 성장 환경, '촌놈' 기질 등이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계속 공부하고 관심 영역을 넓히려고 노력한 게 큰 힘이 됐습니다. 경남 사람은 기질적으로 끈기, 의리 이런 게 강한 것 같아요. 뭔가 마음먹으면 변치 않는 의지가 있습니다. 고집이 센 편이긴 하지만 반면 또 신의가 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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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경상대에서 특강을 하고 있는 박창욱 총장. / 박창욱 씨 제공

Q. 삶의 철학, 원칙, 지향하는 목표 같은 게 있습니까.

"최선이 아닌 최고가 되자, 인생은 애쓰고 노력하는 만큼 달라진다. 이것입니다. 삼천포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범생이'로만 살았습니다. 좀 더 넓은 세상, 꿈꿀 만한 세상에 대해 너무 몰랐습니다. 다행히 이만큼 살기는 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을 왜 가지지 못했을까?', '그 중요한 순간에 작은 불씨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누구를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고, 환갑을 바라보는 입장이니 자식 세대만큼은 멋진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디딤돌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일과 관련해서는 75세까지 강의를 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쉬지 않고 공부해야죠. '한국지식가교센터'를 만드는 것도 꿈입니다. 직업이나 취업·재취업 준비와 관련해 온 국민이 장님 코끼리 더듬는 수준입니다. 많은 경험이 있는 저 같은 베테랑이 곳곳에 즐비합니다. 2만여 개의 직업·산업이 있다고 할 때 한 분야당 5명 정도 멘토를 발굴하고 교육·지도법을 가르치면 10만 명의 직업 전도사가 생길 것입니다. 이들을 바탕으로 제대로 된 직업 준비를 돕는 국가적 시스템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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