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가야라 하면 김해, 금관가야만 떠올린다. 금관가야가 낙동강과 소백산맥.섬진강으로 둘러싸인 가야연맹 여러 세력들을 초기에 이끌었다면, 경북 고령의 대가야(42~562년)는 후기의 맹주였다.
금관가야의 주도권이 고구려.백제.신라와 중국.왜 등의 세력 변동에 따라 사그라든 다음에는 해상교통 요지인 고성.함안에 세력이 형성된다. 또 비슷한 시기에 고령 지역 토착세력이 철기문화를 새롭게 받아들여 후기 주도권을 잡았다고 많은 연구자들이 보고 있다.
고령은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여서 방어하기도 쉬웠고 철광석은 합천에서 가져올 수 있었다. 낙동강 덕분에 교통도 좋았으므로 합천과 의령.창녕.현풍의 세력까지 함께 아울렀다.
따라서 고령은 경남에 사는 이로서는 한 번쯤 들러볼 고장으로 충분히 손꼽을 만하다. 가야의 옛땅이라는 역사의 원형질을 함께하는 데 더해 낙동강을 물길로 사람과 물자가 활발하게 오간 지역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경남과 경북.대구로 행정구역이 나뉘었지만, 육상교통 발달 이전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여서 임진왜란 때는 이들 지역 의병들이 한데 뭉쳐 왜적을 막기도 했던 것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고령의 진산 주산(311m) 꼭대기에서 남동쪽으로 잇달아 있다. 규모가 큰 것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아직 발굴도 안된 채 머리에 나무를 인 작은 고분까지 꼽으면 200기를 훌쩍 넘는 대단한 규모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은 44호분. 지름 27m에 높이가 6m에 이른다. 크기도 굉장하지만 안에서 찾아낸 것은 더 엄청났다. 77년 당시 발굴된 크고작은 널 35개는 순장의 역사를 처음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주석실에는 주인공과 함께 아래위에 두 명이 더 있었다. 저승에서 주인공이 먹고 쓸 것을 넣었던 남.서 석실에도 창고지기가 한 사람씩 순장돼 있었다. 이밖에도 주인공을 위해 파묻은 석실이 무려 32개여서 당시 지배자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당시에도 같은 피붙이들은 애가 끓었을 테지만) 부부로 보이는 30대 남녀가 한 구덩이에 들어 있기도 하고 10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같이 넣은 석실도 있으며 30대 아버지와 8살 가량 된 딸을 함께 담았기도 하다. 마구(馬具)가 많은 석실이나 무기를 잔뜩 차린 석실도 있어 주인공이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승을 누릴 수 있도록 골고루 챙겨넣었음을 알 수 있다.
고분군 들머리의 ‘대가야 왕릉 전시관’은 44호분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은 것인데, 여기를 먼저 들른 다음 전체를 둘러보면 느낌이 풍부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분군은 주산을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가 되기도 한다. 무덤떼가 끝나는 곳에서 왼쪽으로 올라도 좋고 오른쪽으로 걸어도 좋다. 애써 꾸민 듯 곧게 뻗은 리기다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찼고 곳곳에 삼림욕장을 만들어 두었다.
산이 높지 않은 만큼 산길은 편안하다. 왼쪽 오른쪽으로 한 바퀴 빙 두르는 등산로는 1시간이면 족히 맛볼 수 있다. 산마루에서조차 숲이 우거져 전망이 좋지는 않으나 삼림욕을 즐기기는 그만이다.
정돈된 길 따라 고분 사이로 발길을 옮기고 아래를 내려다본다. 남겨진 고분과 유물을 통해 옛적 역사와 당시 사람살이들을 짐작하면서 한편으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썩지 않고 남는 값어치는 무엇인지를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한 번 더듬어 본다.


△가볼만한 곳 - 양전리 암각화

고령에는 보기 드문 선사시대 유적이 두 군데 있다. 양전리와 안화리에 옛적 글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암각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군데 다 둘러볼 필요는 없다. 읍내에서 가야대학교와 88올림픽고속도로 고령 들머리를 차례로 스쳐 지난 다음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해서 포장 안된 길을 덜컹거리며 찾아야 하는 안화리 암각화는 너무 흐릿한데다 숫자도 3개밖에 안된다. 게다가 새겨진 모양도 양전리의 것과 같으니 굳이 발품을 팔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양전리 암각화는 아주 뚜렷하다. 오른쪽 아래위에 도깨비 모양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학자들은 U자와 활 모양, 성혈(性穴)인 구멍을 여럿 새겨놓은 것으로 본다. 옆쪽과 아래에 세 개쯤 겹쳐 그린 동그라미가 있는데 태양을 뜻하는 동심원으로 해석된다.
옛적에는 아주 심오한 뜻을 담아 사람들의 절실한 바람을 새겼을 이같은 무늬들이 마을 한가운데 있는 바위에 줄줄이 있다. 안내판에는 잘 하는 말로 ‘풍요’와 ‘다산’을 비는 기호들로 이 곳이 아마 옛날에는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신들을 향해 이같은 염원을 비는 제사를 올렸던 곳이라고 적혀 있다.
아이들은 옛날 사람들이 뭐 때문에 이렇게 새겼는지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또는 무엇으로 어떻게 새겼는지 궁금해 할 수도 있다. 자기네들의 상상력으로는 잘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겠다. 컴퓨터 통신이나 백과사전을 통해 자료만 미리 갖춘다면 물음에 대답해 주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찾아가는 길

경남에서 고령으로 가는 대중교통편은 좋지 않은 편이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055-256-1621)에서는 오전 10시 35분과 오후 4시 10분 두 대뿐이다. 하지만 진주시외버스터미널(055-741-6039)에서는 오전 6시 10분 첫차를 시작으로 7시 30분 8시 50분 10시 10분 11시 30분이 오전에 있는 차편이고 오후에도 1시 차부터 2시 20분 3시 30분 5시 10분을 거쳐 6시 40분 막차로 이어지니까 마산보다는 낫다.
마산.창원에서 자가용 자동차로 가려면 구마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서마산 들머리에서 올려서 옥포 나들목까지 곧장 달린 다음 고령쪽으로 방향을 틀어 표지판 따라 26번 국도로 계속 가면 된다.
가다보면 개진면과 성산면이 나오고 꼬불꼬불한 금산고개가 이어지는데 옛날 대가야군과 신라군이 한 판 싸움을 크게 벌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고개를 넘어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왼쪽으로 꺾어들면 1km도 채 못가 양전리 암각화가 버티고 있는데 지산동 고분군과 주산을 둘러본 다음 고령을 떠날 때 들러도 좋다.
진주에서는 국도 33번을 따라 가면 된다. 산청군 생비량면을 지나 만나는 의령과 합천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접어들어 삼가면과 합천읍을 가로질러 가는 길이다.
또 마산이나 창원에서 가더라도 특별하게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좋아하는 이라면 내서읍을 지나가는 국도 5호선을 타는 방법이 있다. 이 길 따라 창녕까지 간 다음 창녕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좌회전, 국도 24호선을 타고 합천을 거쳐가는 것이다. 아니면 타고 온 길을 내쳐 달려서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위천 마을까지 간 다음 좌회전해도 고령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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