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역사문화탐방] (6) 진주
남강 끼고 있어 논농사 발달·교통 요지
문산성당, 서부경남지역 가톨릭 중심지
진주역차량정비고, 일제 수탈 통로 역할
진양고 학생들 "고장 자부심 되새겨"

진주 친구들은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다. 다른 지역과는 다른 진주의 특징이다. 오랜 세월 동안 경상우도 또는 경상남도에서 으뜸 가는 고을이었기 때문이다. 진주의 이와 같은 자리매김은 남강 덕분이 크다. 먼저 진주 일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너른 들판을 베풀었다. 다음으로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물길로 편하게 오가도록 교통로도 되었다. 이에 더하여 지리산이나 남해바다와도 가까워 산과 바다에서 나는 특산물도 공급되었다. 진주는 한마디로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그런 덕분에 아주 옛날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역사와 문화를 쌓아왔다.

진양고 학생들의 진주 나들이는 오랜 옛날은 물론 100년 안쪽 역사에도 진주의 이런 특징이 깔려 있음을 몸소 확인하는 걸음이었다. 오전에 찾은 문산성당과 진주역차량정비고가 바로 그러했다. 문산성당은 1900년대 초반 세워졌다. 앞서 본당 노릇을 했던 한옥 건물은 1920년대 지어졌고 그 뒤 본당 구실을 이어받은 고딕 건물은 1930년대 들어섰다. 옛 본당은 앞에 고즈넉한 느낌을 풍기며 엎드려 있고 새 본당은 뒤쪽에 날렵한 느낌을 주며 살짝 솟아 있다.

서부경남 최초 성당인 진주 문산성당.

문산성당은 경남에서 두 번째로 일찍 들어선 가톨릭 신앙공동체다. 예전부터 많이 모여 살지 않았다면 이렇게 앞선 시기에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문산성당이 옛적 소촌역 자리에 들어선 것은 아이러니다. 소촌역은 진주로 이어지는 길목이어서 교통요지였다. 조선시대 역은 지금 기차역과 다르다. 말을 길러 오가는 관원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건물을 지어 잠자리로 내어주기도 했다. 떠도는 정보를 수집해 관찰사한테 직접 보고하는 한편 오가는 사람과 물자도 감시·통제했다. 천주교가 박해받던 시절 역은 교인을 색출해내던 공포의 장소였다. 박해를 견디고 이겨낸 상징이라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기관총 사격을 받은 총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진주역차량정비고.

다음으로는 진주역차량정비고로 옮겨갔다. 일제는 1910년 경술국치를 강요하기 이전에 이미 조선을 수탈하고 있었다. 경부선 철도가 5년 전인 1905년 개통된 것이 그 증거다. 일제는 전라도로 향하는 경전선도 내었는데 1905년은 삼랑진역~마산역 구간을 개통했다. 그리고 1925년에는 진주까지 노선을 늘렸다. 경남 중·서부에서 나는 물산을 수탈하기 위해서였다. 경전선은 진주 서쪽으로 더 연장되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도 경전선 종점은 진주역이었다. 진주 서쪽으로는 철도를 깔아도 수탈할 대상이 많지 않아 그랬을 것이다. 운행을 마친 철도차량들을 손보는 정비고를 여기에 둔 까닭이다.

문산성당 마당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학생들.

문산성당 아늑한 풍경에 젖어들었던 학생들이 진주역차량정비고에서는 이국적인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높다란 붉은색 벽돌 담장과 둥그런 하얀색 화강암 문틀 등이 어우러지면서 그런 느낌을 주었다. 오른쪽 담벼락에는 벽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풀들이 자라고 있는데 이는 6·25전쟁 당시 총탄 자국이다. 정비고 안에까지 들어간 아이들은 차량을 손보기 위하여 철로 아래에 파놓은 데를 가로질러 뛰어다니면서 즐거워했다.

진주향교도 진주의 물산이 풍부했음을 증명한다. 전통시대 공립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향교는 대부분 조선시대 들어섰다. 그런데 진주향교만큼은 고려 초기에 들어섰다. 줄여잡아도 다른 지역보다 400년 이상 앞선다. 1000년 전부터 왕조의 중앙정부가 이념과 풍속을 다잡기 위하여 교관을 보내야 할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큰 고을이었다. 진주향교는 명륜당 오른편에 사교당(四敎堂)이 나란히 놓여 있다. 사방이 트인 건물인데 문행충신(文行忠信) 넷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오후에는 진주성에 가서 국립진주박물관·촉석루·의기사를 둘러보았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하나뿐인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진주성 자체가 임진왜란 당시 격전지였으니 딱 알맞은 자리다. 진주 학생들이 자기 고장 진주에 대해 자부심이 높은 데는 왜적에 맞서싸운 진주성 1·2차 전투의 역사도 크게 한몫한다. 임진왜란 관련 동영상을 먼저 보고 나서 학생들은 2명씩 짝을 지어 미션 수행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당시 역사와 사실들을 게임 방식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미션 수행을 하고 있는 학생들.

문제 풀이는 촉석루에서 상쾌한 남강 바람을 맞으면서 진행했다. 그런 다음에는 바로 옆 의기사로 향했다. 논개를 모시는 사당이다. 아마도 전통시대에 남자가 아닌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사당은 의기사 말고는 없다. 논개는 단순한 기생이 아니었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뛰어든 순절에 대하여 진주 사람들은 나라 차원에서 기려야 한다고 조선 조정에 요구했다. 의기사는 그렇게 진주 사람들이 애쓴 결과물이다.

의기사 현판 오른쪽과 왼쪽에는 매천 황현과 진주 출신 기생 산홍의 시문이 나란히 걸려 있다. 다산 정약용이 쓴 '의기사기(義妓祠記)'도 함께 있다. 옛날에도 논개를 기리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음을 알게 한다. 산홍은 논개의 후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산홍이 자기 첩이 되라는 친일파 이지용의 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매를 맞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학생들은 이렇게 곰탁곰탁 둘러보면서 진주가 자랑스러운 이유를 구체적으로 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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