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등에 업었나 아니면 겨눴나 차이
구국 혁명? 아직도 모르니 한심한 노릇

반란의 날이 밝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숨을 거두면서 유신 정권은 막을 내렸지만 통제와 세뇌에 길들어 왔던 국민은 쉽게 드러내놓고 만세를 부르지 못했다. 드라마 <역적> 삽입곡 가사처럼 봄이 와도 봄이 온다 말을 못 하고 동장군이 노할까 숨죽여 웃고만 있었다. 그 사이 소리 없이 준비를 마친 반란의 무리는 탱크를 앞세우고 무주공산이었던 권력의 심장부를 덮쳤다. 독재에 항거하는 부마항쟁에 유신 권력자들 사이 갈등이 생기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라는 돌발 사태가 터진다. 비상시국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수습에 나선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되어 김재규를 체포한다. 이미 군 요직인 보안사령관이었던 그가 날개를 달고 전면에 나섰다. 수사 발표를 위해 TV화면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첫인상은 서늘했다. 높낮이 없는 메마른 말투와 노려보는 무표정에서 앞으로 닥칠 피비린내가 풍겼다. 동장군이 미친 듯 휘두르는 칼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다시 군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했다. 특히 요직에 앉아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등에 업고 세력을 키우는 전두환을 경계하여 동해안 외직으로 내보내려 한다. 그러나 전두환과 그 일당은 보안사령부 정보망을 통해 이런 낌새를 먼저 눈치 챘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 현장 근처에 있다가 김재규와 함께 움직였던 것을 꼬투리 잡아 도리어 정승화를 제거하는 계획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다. 계엄하에서 그들은 무단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대통령의 재가 없이 정승화를 체포했다.

군을 장악하고 반란에 성공한 그들은 이제 정권을 탈취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봄을 맞은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유신 체제의 몰락이 확실해지자 만년설을 녹이는 봄바람에 아직 언 땅을 비집고 올라온 새싹들이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그를 가로막았다. 80년 서울의 봄바람을 잠재우고 정권을 도둑질하려고 그해 5월 17일 또다시 군을 동원하여 중앙청을 고립시킨 가운데 전국으로 계엄을 확대했다. 국회를 봉쇄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며 초헌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전두환과 군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의 함성은 이미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을 잡고 싹을 자르기 위해 전두환과 그 일당은 광주를 피로 물들인다. 반란과 쿠데타로 죄 없는 목숨을 빼앗고 그는 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한다. 영화 <택시 운전사>를 함께 본 열네 살짜리 아이가 물었다. 팔십 중반인 그에 대한 호칭 따위는 없었다. "전두환은 능력 있고 세력도 있는 장군이었으니 정말 사람들을 위해 일했더라면 굳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언젠가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을 텐데 왜 저렇게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요?" 글쎄 그 쉬운 길을 두고 왜 험악한 길에 올랐을까?

김재규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박정희는 이승만처럼 절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총통이 되어 독재할 것이라 했다. 이승만 수명에 빗댄다면 향후 25년 이상 민주화는 요원하단 소리다. 소설 같은 생각이지만 12·12반란이 없었더라면 광주의 비극이나 신군부 5공 독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공화당과 신민당이 비슷한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큰 충돌 없이 개헌에 합의하여 좀 더 일찍 민주화를 앞당겼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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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역시 대통령이 피살되는 위기 상황을 잘 수습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금 더디더라도 큰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12·12의 험한 길에 오르면서 박정희가 살아 총통으로 통치했을지도 모르는 세월 이상을 유린했다. 그는 광주의 학살자나 발포자로서인 범죄자가 아니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린 역사의 죄인이다. 그러고도 스스로 구국의 결단이니 구국의 혁명이었노라 목청 높인다. 혁명은 민중을 등에 업고 봉기하는 것이고 반란은 민중을 겨누고 나선다는 것을 그 나이 되도록 알지 못하니 막내 손주 같은 아이에게조차 막말 들어도 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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