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지 문화 탐방] (19) 진주 장재늪·서원못·연못 들판
강 범람으로 토사 퇴적들 한가운데 습지 형성
자연 그대로 아름다움 간직 마을마다 '홍수설화'많아

진주 집현면 장흥·월평·신당마을 일대 들판에는 습지가 셋 남아 있다. 장재늪과 서원못 그리고 연못이다. 오래전부터 여기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다. 들판은 네모꼴로 생겼다. 가로 세로 모두 2km 안팎이다. 동쪽에는 남에서 북으로 솟아오르는 남강이 놓여 있다. 서쪽과 북쪽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였다. 서쪽 야산과 북쪽 야산 사이를 지내천이 비집고 나와 동쪽 남강으로 흘러간다. 남쪽으로는 하촌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며 아래쪽 들판과 구분지어 준다. 하촌천 일대가 모두 들판인 것은 아니다. 끝머리가 봉긋한데 높이가 낮아서 무슨 야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정도다.

◇전형적인 배후습지

남강은 수량이 풍부하다. 낙동강 전체의 30%를 웃도는 수준이다. 진주는 물론 하동·산청·합천·함양·거창 등 경남 서부 지리산 자락들에 쏟아지는 비들을 모두 쓸어담기 때문이다. 말이 좋아 풍부한 수량이지 홍수와 관련지으면 엄청난 물난리가 된다. 경호강과 덕천강이 만나 남강을 이루는 진주 동쪽 즈음(지금 남강댐 자리)에서는 더욱 불어난다. 이렇게 불어난 물이 진주 서쪽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에 장흥·월평·신당마을 들판이 있다. 불어난 남강 물은 지내천·하촌천 같은 지천의 흐름을 가로막는다. 나아가 그런 지천의 물줄기를 타고 거꾸로 거슬러오르기까지 한다.

역류(逆流)와 범람이다. 일대 들판은 꼼짝없이 물에 잠긴다. 들판을 가득 덮은 물은 며칠 지나면 대부분 빠져나간다. 만약 모내기철을 지났다면 나중에 물이 빠지고 나서 무슨 곡물을 대파(代播)할지 생각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낮은 지대에 들어간 물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장재늪·서원못·연못 자리다. 그런데 이들 세 습지는 야산 비탈 바로 아래에 있거나 들판 한가운데 있다. 들판 한가운데가 어떻게 해서 가장자리보다 낮아지게 되었을까?

진주 장재늪 양지바른 물가에 줄지어 앉아 햇살을 즐기는 오리떼.

강물이 범람하지 않으면 당연히 가장자리가 더 낮다. 범람이 거듭되면서 물과 함께 섞여 있던 모래와 흙이 지내천과 남강 가장자리에 내려앉으면서 두툼하게 쌓이게 되었다. 자연제방이라 한다. 이 때문에 가장자리가 높아지면서 빠져나가는 물길을 가로막게 되었다. 하천 뒤쪽에 배후(背後)습지가 형성되는 원리다. 지금은 자연제방의 원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장재늪·서원못·연못은 창녕 우포늪처럼 크지는 않다. 대신 한눈에 쏙 들어오는 크기로 배후습지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홍수 관련 설화들

배후습지를 둘러싸고는 둘레 야산이나 언덕 또는 자연제방에서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원래는 습지였겠으나 농지로 변환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배후습지는 이런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장재늪·서원못·연못은 지금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옛날에는 거의 전부가 논이었겠으나 지금은 비닐로 하우스를 지은 밭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습지 풍경은 완연하다. 물버들이 바깥에 줄지어 있고 안쪽으로 가면 갈대·억새·줄·부들 같은 습지식물이 무리를 이루었다. 12월 3일 찾았을 때는 인상깊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겨울철새인 오리들이 양지바른 데 가로로 길게 모여 앉아 햇살을 따사롭게 즐기는 모습이었다. 세 곳 습지는 자연 그대로다. 사람들이 머물러 쉴 수 있는 시설도 없다. 사람들이 놀러 오지 않는 까닭이다. 대신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다. 씨알 굵은 물고기가 적지 않게 잡히는 모양이다.

이런 일대에는 홍수 관련 설화가 많다. 으뜸은 장대산이다. 장대산은 들판 서쪽 장흥 마을 뒤쪽에 있다. 옛적 이름이 잔대산이었다. 천지개벽이 되어 사방천지가 물에 잠기고 산들도 모습을 감추었는데, 잔대산만은 꼭대기까지 잠기지는 않고 제사 때 쓰는 '잔대'만큼 남았다 해서 '잔대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 물난리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또 심했는지를 일러준다. 이 밖에 여러 소소한 것도 많다.

아래 사진은 장재늪.

'월평'이라는 마을 이름도 눈여겨볼 만하다. 월평은 달(月)동네(坪)다. 옛날 이름이 수리월(水裡月)이다. 물(水) 속(裡)에 있는 달(月)이다. 일대가 물에 잠기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명칭이다. 진주시 기록을 따르면 월평리가 장흥마을에서 독립하여 행정(行政)리가 된 해가 1947년이다. 전에는 마을이라 할 수 없었겠지. 일대는 야트막한 언덕배기다. 물의 드나듦을 일제가 토목기술로 막아낸 이후에야 정착해 살 수 있었던 땅이라고 보아야 한다.

절정은 장재늪이다. 장재늪에서 장재는 장자(長者=부자)다. 만석꾼이지만 인색했다. 시주하러 온 스님을 쪽박을 깨어 쫓았다. 그러나 참한 며느리가 있었다. 며느리는 시주를 제대로 하려 했으나 시아버지가 막았다. 스님은 며느리한테 집을 떠나라면서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 했다. 하지만 인지상정이 어디 그러한가. 큰 소리가 나자 돌아보고 말았는데 살던 집터는 물에 잠겼고 돌아본 며느리는 아들과 함께 죽고 말았다. 실은 드물지 않은 얘기다. 창녕 장척늪에도 이런 설화가 있고 충북 충주에도 있다. 물을 많이 담는 마을이라면 으레 있는 이야기로 보면 맞겠다.

◇조지서와 신당서원

서원못은 바로 앞에 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신당서원인데, 주인공은 지족당 조지서(趙之瑞·1454~1504년)다. 조지서는 비운의 인물이다. 조선 10대 임금인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다. 세월에 쓸리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려 노력했나 보다. 그러다 보니 미움을 샀다. 연산군은 임금이 되자 조지서를 패서 죽였다.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결박을 당하니 숨이 막혀 형장 3대를 맞고 그만 죽어 버렸다. 그러자 전교하기를, '당직청에서 곧 머리를 베어, 철물전 앞에 효수(梟首)하고, 시체는 군기시(軍器寺) 앞에 두라' 하였"다(1504년 윤4월 16일). 이어 "능지(凌遲)하여 시체를 팔도에 전달하고 가산을 몰수하며, 죄명을 판자에 새겨서 분명히 보"이라(윤4월 17일), "머리를 팔도에 조리돌린 후 구렁에 버려두라"(윤4월 28일), "뼈를 부순 가루를 강 건너에 날리라"(1505년 1월 26일)고 하였다.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조지서는 1506년에 곧바로 사면·복권되었다. 그러나 이미 죽은 몸이었다. 1710년에는 지역 선비들이 이런 조지서를 모시려고 신당서원을 세웠다. 1718년에는 당시 임금 숙종이 여기에다 편액을 내리고 몸소 제문(祭文)까지 지어주었다. 지금도 서원못 바로 앞 길가 공터에 이 제문을 새긴 빗돌(진주장흥리숙종사제문비)이 있다. 신당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어 없어졌고 마당에 있던 사제문비만 남은 것이다. 서원못은 신당서원 이전에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 평생 한 목숨은 그 곡절이 많든 적든 산천에 견주면 턱없이 짧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국면이다.

세 곳 습지 가운데 연못은 찾아가기 쉽지 않다. 들판 가운데 있는 데 더하여 농로도 가닿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장재늪과 서원못은 바로 옆에 도로가 반듯하게 나 있다.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으면서 전체 풍경이 푸근하고 그윽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인지 안내팻말 하나 없는 일대를 거닐다보니 진주시청이 나서서 둘레를 꾸미고 가꾸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렇게 해서 자연생태의 환경이 좀더 안정적으로 되면, 그 자체가 우리 인간에게는 손쉽게 찾아가 노닐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주관 :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

문의 : 환경교육팀 055-533-9540, gref2008@hanmail.net

수행 : 경남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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