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전환 공청회서 드러난 적대감
상대 못 믿어 불행 자초 상황과 흡사

"정규직-비정규직 손잡고 같이 가요." "결과의 평등 노, 기회의 평등 예스." "무임승차 웬말이냐 공정사회 공개채용."

지난달 23일에 열린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방안 공청회'에서 참가자들이 내든 손팻말 구호들이다. 첫 번째는 정규직 전환을 바라는 비정규직들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정규직 사원들 말이다. 구호만큼이나 공청회 분위기 또한 살벌했다 한다. 발표자와 토론자의 발언에 따라 환호와 박수, 야유와 탄식이 교차했고, 특히 객석 토론 때엔 정규직 직원들이 비정규직을 향한 적대감을 고스란히 드러내기도 했다 한다.

이날 여러 경로로 전달된 공청회 장면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작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기득권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겠지만, 사기업도 아닌 공기업에서, 그것도 공개된 자리에서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할 만큼 우리 사회가 갈라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하긴 인천공항 사례뿐일까? 이른바 '명문'이란 수식어가 붙은 학교 학생들이 그렇지 못한 학교 학생들에게 보이는 차별적인 시선이나 소위 '브랜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인근 임대주택 단지 주민들을 낮춰 보는 시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울타리 안쪽 세상과 바깥쪽 세상의 격차가 벌어질수록 서로를 향한 적대감은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다.

물론 수많은 사람이 어울려 사는 사회가 작동하려면 다양한 기능을 수행해야 할 울타리들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울타리 자체가 전체 구성원을 아우르는 조화의 기반이 되기보다 안팎을 나누는 반목의 이유가 될 때 사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힘센 안쪽 사람들이 힘 약한 바깥쪽에게 적대적일 때 그 정도는 심각해진다.

울타리 안 사람들이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고 바깥사람들을 적대하는 모습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 '죄수'의 모습을 닮았다. 진술을 앞둔 두 죄수가 협력하여 입을 맞출 경우 모두 가벼운 형량을 받게 되는 줄 뻔히 알지만 혹시 상대방에게 배신 당할 경우 최악의 형량을 감수해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결국 둘 다 무거운 형량을 피할 수 없는 적대적인 진술을 하고 마는 상황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임이론인 죄수의 딜레마가 만들어지기 위한 전제조건은 죄수들 사이에 정보가 '차단'되는 것이다. 동료 죄수가 진술을 어떻게 할지 모를 때, 서로 신뢰가 없을 때 죄수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울타리 안 사람들이 바깥사람들을 적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바깥사람들이 어떤 처지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기에(혹은 관심이 없기에) 안쪽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렇게 행동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물론 반대도 있다. 미국의 언론인 레베카 솔닛은 '재난 유토피아'라고 하는 통찰력 깊은 개념을 제시했다. 불가항력의 재난 현장에서 사람들은 자주 이타주의와 연대의 정신으로 지옥 같은 상황을 천국으로 승화시키는 기적을 일궈내기 때문이다. 서해안에서 유조선 기름이 유출됐을 때도, 일본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 안위에 만족하지 않고 재난 현장에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죄수의 딜레마에 처한 사람과 재난을 겪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텐데 왜 이토록 다른 행동이 나오는 걸까? 재난 상황에선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충분히 알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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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신영복 선생은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하다"며 "입장의 동일함이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설파했다. 울타리 안 사람들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지 않으려면 바깥사람들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서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면 유토피아 정도를 감히 꿈꿀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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