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러지성 비염을 피하는 방법은 모터사이클

알러지성 비염

 

알러지성 비염, 참 지랄 맞다. 어렸을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되어서도 없었던 증상인데 마흔 넘어서고 나서 어느 때인가 갑자기 생겼다.

멀쩡하다가 시도 때도 없이 갑자기 맑은 콧물이 주르륵 흐른다. 코를 풀지 않으면 콧속이 간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기도 하고 코가 막히기도 한다. 어떨 때는 콧물 흐름과 함께 발작적으로 기침이 이어질 때도 있다. 그래서 휴지로 코를 계속 푼다. 나중에는 코가 벌게지고 코밑이 헐기도 한다. 휴지도 낭비가 심하다. 어떤 때는 반나절 만에 휴지 한 통을 다 써버릴 때도 있다.

병원에 가면 알러지성 비염이라고 하는데 딱히 약도 없다. 처방해주는 약은 그때뿐이다. 문제는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는 증상인 데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병원 가서 약 처방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찾아낸 방법이 있다.

▲ 마치 누가 꽂아놓은 듯 모터사이클 타이어 트레드홈에 낙엽이 붙어있다. 충북 단양 소선암공원 캠핑장. / 조재영 기자

 

우선은 약국에서 의사 처방 없이 살 수 있는 약 중에 한방 코감기약을 구입해서 먹는 것이다. 콧물을 마르게 하는 작용을 하는 것인지 효과가 꽤 있다. 대신 약을 먹고 나서 시간이 조금 걸린다. 또 한 가지는 병원에서 콧구멍에 직접 분사하는 약을 처방받아서 그 약을 구입해서 하나는 집에, 하나는 사무실에 두고 급할 때마다 코에 넣는 것이다. 이 약은 그리 크게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눈에 안약을 넣는 것이다. 코 얘기를 하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증상을 관찰했을 때 눈물 흘림과 비염 콧물 증상이 동시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코와 눈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다들 아는 얘기 아닌가. 천정을 쳐다보고 눈에 안약을 넣고 조금 지나면 입속에서 안약 맛이 느껴지는 경험을 누구나 했을 것이다. 바로 그것에서 착안한 방법이다. 비염 콧물이 심할 때 미리 사놓은 알러지성 안약을 눈에 넣고 기다리면 증상이 나아진다. 이 방법은 제법 효과가 있다.

중학교 때 같은 반에 축농증이 있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항상 코를 풀었다. 수업시간에도, 체육 시간에도 코를 풀었다. 그래서 맨날 코가 벌겠다. 코가 막혀있으니 항상 찡찡거렸다. 그것 때문에 코안의 염증을 긁어내는 수술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듯도 싶다. 사실 그때는 그 친구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비염에 시달려보니 이제야 그 친구가 그 시절에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했을지 조금이나마 짐작이 됐다. 사람이란 게 그런가 보다. 자기가 겪어보지 않으면 남의 고충을 알기가 어렵다. 남의 어려움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더 알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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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청송은 사과의 고장이다. 어딜가나 사과나무가 있었다. / 조재영 기자

 

이야기가 옆으로 샜다. 비염 이야기를 서두부터 이렇게 장황하게 한 이유가 있다. 나름대로 찾아낸 비염 대처법 중에서 가장 확실하다 싶은 것이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집이나 사무실 등 실내에서 비염 때문에 콧물이 주르륵 흐르다가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나가 달리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멎는다. 또 모터사이클을 타는 중에 갑자기 비염 증상이 나타나서 콧물이 마구 흐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오토바이 타는 것이 무슨 만병통치약이냐? 오토바이 타고 싶어서 괜히 갖다 붙이는 핑계지…"라고 말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란 제가 원하는 쪽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왜곡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모터사이클을 타면 비염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아마도 밀폐되지 않은 공간, 맑은 공기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알러지성 비염 증상은 대체로 특정한 실내에 들어섰을 때, 혹은 특정한 차를 탔을 때 나타났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타면 비록 도시 속이라 하더라도 밀폐되지 않은, 항상 실외에 있게 되고, 외곽으로 나가면 항상 맑은 공기와 접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터사이클 바퀴에 동력이 전달되어 구르기 시작하면 온 신경이 달리는 데에만 집중되기 때문에 비염 증상이 멎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비염 특효약'을 요즘은 좀처럼 얻기 어렵다. 나는 요즘 모터사이클을 거의 타지 못하고 있다. 잘해야 한 달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이다. 그래서 자조하기도 한다. "이래서야 내가 모터사이클 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청송 주산지

경북 청송, 충북 단양을 거쳐 경북 영주 등지를 돌아오는 1박 2일 모토캠핑을 간 것은 전달이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지만 청송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예전에 한 번쯤 지나갔을 수도 있지만 목적지 혹은 여행의 주요 지점 중 한 곳을 청송으로 정한 것은 처음이다.

우리는 창원-창녕-경북 청도-경산-영천-청송을 달렸다. 맑고 맑은 날이었다. "이런 날 달리지 않으면 도대체 언제 달린단 말인가?" 라는 독백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라이딩하기에는 그만인 날이었다. 창원에서 출발한 지 대략 2시간 만에 청송에 들어섰다.

지방도로 변 작은 교회 앞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익히 알려진 대로, 과연 청송은 사과의 고장이었다. 가는 길마다 사과밭이었다. 입맛을 다시게 하는 사과가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저렇게 잘 생긴 사과를 만들어내느라 농장 주인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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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 주산지. / 조재영 기자

 

우리가 쉬었던 곳 바로 앞에는 넓은 사과밭이 있었고, 옆에는 사과를 선별해 저장하는 창고가 있었다. 창고 규모가 상당했다. 사람이 있었더라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그곳에서 출발한 우리는 곧장 주왕산 주산지로 달려갔다. 주산지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영화에서는 저수지 가운데 바지선 같은 구조물 위에 절이 있었고, 물속에 허리를 감춘 왕버들이 일주문 역할을 했다. 스님과 신도들은 노 젓는 쪽배를 타고 절과 밖을 오갔다. '윤회'와 '업보'를 잘 담아냈던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산지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인기가 높다. 저수지를 배경으로 한 단풍 사진이나 물속에 뿌리를 박고 마치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이는 왕버들 사진은 누구에게나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주차장이 만원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주차장에 차들이 북새통을 이뤘다. 하지만 그런 틈바구니에서도 모터사이클을 주차할 공간은 여기저기 있었다. 우리는 다른 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주차를 했다. 그리고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주산지로 가기 전에 고픈 배를 채웠다. 주차장 옆 식당에서 '묵채밥'을 먹었는데 조금 독특했다. 양푼이에 육수와 묵, 야채가 들어있고 밥과 반찬이 따로 나왔다. 맵거나 짜지 않고 육수와 묵, 야채가 어우러진 맛이 꽤 좋았다. 처음에는 주차장 옆 식당 음식에 좋은 맛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좋았다. 거기다 따로 주문한 파전도 괜찮았다. 우리는 묵채밥 한 그릇씩을 뚝딱 비우고 주산지를 둘러봤다. 사람이 많았다. 그때가 단풍 들기 직전이었으니 아마도 단풍이 곱게 든 시기에는 주차장과 둘레길이 미어터지지 않을까 싶다.

주산지는 조선 경종 때인 1720년 8월에 착공해 이듬해 10월에 완공되었다. 규모는 그리 큰 편이 아니다. 길이 200m, 폭 100m, 수심 8m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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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청송군 주산지 아래 식당에서 먹은 묵채밥. / 조재영 기자

 

영주 부석사

단양 캠핑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우리는 소백산맥 죽령을 넘어 영주로 향했다. 부석사에 가기 위함이었다. 부석사는 2000년에 가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17년 만의 방문이었다. 2000년에는 각시와 함께 갔었는데 부석사보다는 부석사 가는 길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하얀 사과꽃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맑고 따스했던 봄이었다. 나는 사과꽃을 배경으로 각시 사진으로 슬라이더 필름으로 찍었었다. 행복한 기억이다.

부석사 사하촌은 유명 사찰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그렇듯 주차장과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 큰 연못과 인공폭포도 새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사하촌이 끝나고 절로 향하는 지점에서 입장권을 샀다.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사람들 틈에 섞여서 절로 향했다. 중간쯤에 일주문을 지나기 전이었는지 지나고 난 뒤였는지 기억이 정확지 않은데, 당간지주가 서 있었다. 사람 키 보다 훨씬 높게 깎아 세운 2개 돌기둥이 서 있다. 키가 4m쯤인 당간지주는 당간이라는 깃대를 받쳐주는 2개 기둥이다. 당간은 당이라는 깃발을 매다는 깃대다. 당은 불교 그림이나 표식을 넣은 깃발이다. 결국 당간지주와 당간은 불교 깃발을 높이 세우기 위한 장치인 셈이다. "여기서부터는 신성한 구역이니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시오"라고 신호를 주는 것이다. 일주문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듯하다. 일주문은 절과 세속의 경계지점이다.

부석사에 올라서 네 가지를 봤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무량수전과 그 앞에 있는 안양루, 전설이 있는 부석, 그리고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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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사와 그를 사모한 선묘의 전설을 간직한 안양루. 아래층 안양문을 지나면 무량수전이 나타난다. / 조재영 기자

 

부석사에는 전설이 있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공부하고자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을 연모하는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가 깨달음을 얻은 뒤 귀국길에 올랐는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했다. 용은 의상대사가 탄 배가 신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했다. 의상대사가 이곳 봉황산에 절을 지으려할 때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용이 바위를 들어올려 반대하는 사람들을 막았다. 용이 바위를 뜨게 했다고 해서 '부석사'라고 불렀고, 용이 돌로 변해 무량수전 앞 마당에 묻힌 채 절을 지키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용이 공중에 뜨게 했다는 '부석'은 무량수전 왼쪽에 있는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이렇게 적혀있다고 한다. "위 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 아쉽게도 나는 부석과 부석을 받치고 있는 바위 사이로 실을 넣어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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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풍경. 오른쪽에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안양루이고 멀리 보이는 산군이 소백산맥이다. / 조재영 기자

 

사실 나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무량수전보다는 그 앞에 있는 안양루가 더 끌린다. 나는 건축에 문외한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무량수전은 무량수전대로 멋이 있지만 그보다는 안양루가 더 멋있다. 특히 아래쪽 사각에서 올려다보면, 2층으로 보이는 옆 모습은 마치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장수가 우뚝 서서 발아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무량수전은 극락이고 그 극락에 닿으려면 안양루 아래 계단을 밟아 올라가야 한다. 안양루는 극락에 들어가는 관문인 셈이다. 무량수전과 안양루 사이 마당에서 앞을 바라보면 이곳이 왜 극락인지 안다. 풍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도 그곳에 서면, 이곳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이 겹겹이 이어지고 그 위로 구름도 층층이다. 햇살도 투명하다. 그 무량수전을 등지고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평온할 뿐이다. 더 바랄 게 없다.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고 낮이 30시간쯤 되었다면 오래오래 머물고 싶은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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