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선의 '섬소년'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흥행하면서, 드라마 OST 곡들의 인기와 더불어 복고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던 적이 있다. 이때 1988년에 발매된 신촌 블루스 1집 수록곡 이정선의 '아쉬움'이 흘러나와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70~80년대의 노래신청이 쇄도하면서 방송가, 음악카페할 것 없이 음악을 틀어주기 바빴다. 이런 와중에 사람들은 이정선의 노래와 음악에 대하여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었다.

대중의 잣대로 한 일반적 시각은 그를 두고, 순수한 동심과 아름다운 자연을 소재로 담백하고 시원하게 노래를 부른 가수, 혹은 모든 통기타 애호가들에겐 기타 사부의 이미지를 지닌 '이정선 기타교실'을 펴낸 유명저자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는 이정선 음악에 관련한 일부 평가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에게 숨어있는 내면의 음악 세계는 웬만한 마니아가 아니면 알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평론적인 이정선을 알아보기 이전에 음악의 길로 데뷔하는 과정과 초기 음반에 관련한 일화를 먼저 소개할까 한다.

한국 포크 블루스의 선구자로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이정선은 1950년 10월 30일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서울 용산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미군기지가 있던 지역이어서 서구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그는 학창시절부터 자주 레코드가게에 가서 음악을 듣거나 음반을 구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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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선의 데뷔앨범.

군악대장이었던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용산고 시절 이미 독학으로 기타를 연습해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지만, 부친의 반대로 내놓고 음악을 하기에는 불가능한 환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음악을 들으며 밤새워 그림을 그렸던 이정선은 시각적인 것을 청각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연습할 수 있었다. 그는 나중에 이를 두고 "대학에서 조소를 공부했지만, 음악 또한 미술의 한 범주라 생각해서 통한다"고 밝힌 바 있다.

1969년 이정선이 서울대학교 미대 조소과 2학년일 때 회화과 신입생으로 들어온 김민기를 운명적으로 만난다. 그해 군 입대 전까지 학교휴게실에서 앞으로 통기타음악의 거장이 될 두 사람은 기타연주를 같이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당시 김민기의 클래식 기타 연주 실력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며, 이정선은 벤처스 음악에 심취해 있었다. 입대 한 달 전인 9월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열린 한대수의 작곡발표회를 본 그는 통기타로 노래 반주를 할 수 있으며, 자작곡을 통기타로 연주한다는 것에 충격받았다. 이후 군악대에 들어간 이정선은 관현악 편곡과 국악에 눈뜨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되며, 본격적으로 통기타를 치며 음악 감각을 익혔다.

1971년 말 제대를 앞두고 외출한 그가 우연히 들린 동네 음반가게에서, 음악적 교분을 나누었던 대학 후배 김민기의 앨범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구입해서 들었다. 놀랍게도 김민기의 자작곡으로 이루어진 음반이 아닌가. 이전에 한대수 공연을 보고 받은 충격의 전율이 다시 한번 더 그의 가슴에 엄습하였다. 이정선은 그때부터 느낀 바 있어 창작에 몰두하였다.

1973년 제대 후 2학기 복학을 앞두고 집안 형편이 기울어 음악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엔 자신이 가수로 활동하기보다 이용복, 영씨스터즈 등 여러 가수의 가사를 번안해 주고 편곡과 통기타 연주를 주로 하였다. 한 번은 CBS방송국에 연주자로 출연했다가 PD 김진성의 소개로 알게 된 김혜원과 함께 노래를 녹음했는데, 우연히 이 노래를 들은 평론가 최경식은 그에게 계속 작곡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이 인연으로 최경식은 1973년 2월 명동 YWCA 대강당에서 '이정선 노래발표회'를 열어주었다. 이정선의 공식 데뷔무대였던 것이다. 대학에 복학한 그는 평론가 최경식과 김진성 PD가 주관하는 공연이 있으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봉사했다. 두 사람은 이정선이 데뷔음반을 낼 수 있도록 서라벌레코드사와 계약을 주선해 주었다.

오세은과 이정선은 어쿠스틱 기타를 맡았고, 일렉트릭 기타는 김영배, 베이스 기타는 최영택, 김영준과 이영림이 키보드와 퍼쿠션을 맡아 브라스 사운드까지 시도하였다. 이들은 제법 탄탄한 밴드시스템을 구축하여 녹음을 마칠 수 있었다. 마침내 1973년 말 유니버샬 레코드는 그의 데뷔앨범이자 첫 독집 <이정선 노래모음-이리저리>를 발매하였다. 그런데 발매를 앞둔 사전심의에서 수록된 11곡 중 '이리저리'와 '모두 다 함께'를 제외한 9곡이 심의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이에 다급해진 레코드사는 심의위원들을 어렵사리 설득한 끝에 음반을 발매할 수 있었다.

앨범은 몇 개월간 약 5000장이나 판매되는 호조를 보였으나, 결국 2면의 첫 수록곡 '거리'의 가사가 빌미를 잡혀 삼아 판매가 중단됐다. 특히 이정선 초기 블루스 포크 명곡으로 평가받는 '거리'는 방송금지조치마저 내려져 버리고 말았다. 문제가 된 가사 중에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 거리를 덮었네"라는 내용이 아주 냉소적이어서 불신 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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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선의 공식 1집 앨범 <섬 소년>.

금지된 노래가 들어있는 음반은 팔지 못한다는 당시 지침에 의해 레코드사는 배포된 음반을 자발적으로 수거하여 폐기처분하였다. 이정선의 첫 독집은 별다른 홍보 없이 세상에 나왔다가 사장된 초 희귀음반이다. 오랜 기간 준비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벌기 위해 단기간에 만든 음반이었지만, 그 시절에 드문 창작곡으로 구성하여 블루스 포크를 시도하며 시대를 선도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정선의 '마이너스 집'으로 불리는 이 음반은 2005년 한 인터넷 음반 경매 사이트에서 당시로는 국내 대중가요 음반 경매 사상 최고가인 176만 원에 낙찰되어 음반수집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를 두고 이정선은 "가끔 내 초기 음반들이 엄청난 고가에 거래되는 걸 보면서, 왜 저렇게 심하게들 콜렉팅 할까 생각해 보았다. 이따금 그렇게 고가에 거래된다면 내 거도 팔아버릴까 생각한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만큼 초기 음반들은 그의 음악 인생에 있어서 많은 상처를 남겨주었다. 다행히도 2013년 리듬온사에서 LP와 CD로 만들어 재발매하였는데, 정작 본인 허락을 받지 못해 비공식으로 발매한 음반이라 하겠다.

이정선의 공식 1집 <섬 소년>은 1976년 지구레코드사에서 발표한다. 하지만 이 앨범은 대중가요 음반사에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황당한 비화를 지닌 음반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공식 1집이 발표되기 이전인 1975년에 제작된 소위 '0집'으로 불리는 또 다른 음반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소 의아하게 들리는 0집 앨범에는 그의 속 쓰린 아픔이 고스란히 숨겨져 있다. 이 두 음반의 차이점은 녹음내용이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앨범 재킷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두 앨범의 재킷을 살펴보면 장발의 자유스러운 모습과 깔끔한 이미지를 보여 주기위해 머리를 짧고 단정하게 손질한 이정선이 보인다. 이렇게 공식 데뷔음반 재킷이 두 장인 사연은 나름 이유가 있었다.

공식 데뷔앨범을 녹음했을 당시 이정선은 서울 한복판인 충무로4가의 달동네에서 살았다. 집 아래층이 두부 공장이라 밤새워 기타를 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한다. 0집 재킷은 그가 살던 동네 뒷골목 공중화장실 앞에서 찍은 사진으로, 다소 부자연스럽지만 그런대로 신선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음반 발표 직전에 진행된 심의에서 담당자는 재킷에 찍힌 이정선의 장발을 문제 삼아 판매금지처분을 내렸다. 첫 음반에 이어 다시 제작된 음반까지 검열에 걸려서 발매를 못 할 경우, 그는 영원히 음악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며 고민에 빠졌다. 이정선은 머리를 시원하게 확 자르고, 장소도 앞에 보다 훨씬 밝은 곳에서 사진을 다시 찍어 레코드사에 맡겨버렸다. 그는 이때를 두고 "또 죽여 버리든지 맘대로 해라. 이것만 내고 다신 음악 안 하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박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런 마음이 통했는지 새롭게 제작된 공식 데뷔 앨범은 무사히 심의를 통과하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앨범은 이정선이 직접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까지 모두 한 한국 최초의 음반으로 기록되며, <섬 소년>은 공식적인 1집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정선의 앨범 가운데 국내에 본격적인 일렉트릭 블루스 기타를 선보였던 7집 <30대>와 그가 참여했던 신촌 블루스 1, 2집은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선정되어 있다. 그는 미대 출신답게 음반에 수록한 음악들을 재킷디자인으로 나타내며 '음악의 미술화'라는 분야를 새롭게 연 선구자였다.

외딴 파도 위 조그만 섬마을 소년은

언제나 바다를 보았네.

바다 저 멀리 갈매기 날으면

소년은 꿈속의 공주를 불렀네.

파도야 말해주렴 바닷속 꿈나라를

파도야 말해주렴 기다리는 소년 음~

 

어느 바람이 부는 날 저녁에

어여쁜 인어가 소년을 찾았네.

마을 사람이 온 섬을 뒤져도

소년은 벌써 보이지 않았네.

파도야 말해주렴 바닷속 꿈나라를

파도야 말해주렴 그 소년은 어디에 나~

 

- 이정선 작사·작곡인 이정선의 '섬 소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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