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지 못할, 그렇지만 물러서지 않은 처절한 전쟁

의병운동에서 의병전쟁으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면서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때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국운이 위태롭게 되자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위정척사운동으로 유명한 최익현이 앞장서자 전국에서 유생을 주축으로 하는 의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경남에서는 앞서 1편에서 언급했던 함양 안의 출신 노응규가 관직을 버리고 최익현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다. 노응규는 1906년 6월 4일 전북 태인에서 최익현과 합류, 의병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곧 일본군의 공격으로 최익현을 비롯해 지도부 13명이 대거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노응규는 창녕군 이방면으로 피신했다. 그는 다시 1906년 늦가을 충북 황강군(현 충북 영동군)에서 진을 치고 의병대를 일으켰다. 노응규 의병대는 경부철도와 일본군 시설, 일본군 척후대를 공격하는 등 성과를 냈다. 그리고 1907년 1월 서울에서 타 지역 의병대와 합치는 것을 기획하였다. 그 와중에 1907년 1월 21일 밀정의 밀고로 일본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일본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티다 같은 해 2월 16일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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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태수 생가터. /국가보훈처

최익현과 그를 따르는 일부 양반 유생이 일으킨 의병은 실패했지만,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7월 20일, 고종황제가 일본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고,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사실상 대한제국의 멸망이 눈앞에 이르렀다. 이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단순 의병운동이 아니라 '의병전쟁기'라고 부른다. 경남에서는 문태서, 김동신 의병대를 주축으로 전성범, 임봉구, 윤두순, 이동찬, 채선달, 박해을, 임동구, 이규철, 박설장, 이순진, 진영극, 박매야, 이두익, 박동의, 윤영수, 김교상, 서경원, 윤일이, 신상오, 박매지, 성만석, 권명구, 이안옥, 신상호, 우수보, 손마생, 이만용, 노성화, 김홍대, 이학로, 전성범, 유종환 등 무수한 의병지휘관들이 있었다. 또한 '홍 주사', '권씨', '송가'라고 정확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지휘관들도 있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경남지역 의병대는 총 36개 부대, 총 병력은 약 2000~3000명으로 추정된다. 이에 일본은 보병 14연대를 경남에 파병해 의병대와 맞서게 된다.

경남 출신 문태서 의병대의 분전

경남 의병대 가운데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진영은 안의군(현 함양군 안의면 일대) 출신 문태서 의병대다. 문태서는 1907년 의병을 일으켰고, 그해 1월 무주군 부남면 고창곡에서 일본군 40여 명을 사살하고 총기 50여 정을 빼앗는 등 의병으로서는 보기 드문 큰 전과를 올렸다. 문태서는 호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1908년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했다. 이 작전은 전국에서 모인 의병 약 6000~1만 명이 서울로 들어가 일본군을 몰아내고 국권을 되찾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곳곳에서 의병을 차단하고, 의병대 사이에서도 체계적인 진군이 이뤄지지 않아 막상 서울 동대문에 도착한 의병은 2000명에 불과했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의병들은 각지에서 봉기해 일본군을 괴롭히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문태서는 1908년 2월 의병대를 이끌고 전남 무주 주재소(경찰지서)를 공격하다 체포됐지만 일본경찰 5명을 사살하고 극적으로 탈출했다. 문태서는 고향인 안의군으로 돌아와 다시 의병대를 꾸렸다. 문태서 의병대는 현재 전북 무주군 횡천면 삼공리에 훈련소를 두고, 호남 의병장인 박춘실, 신명선 의병대와 연합해 작전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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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의병 모습.

1908년 4월, 문태서 의병대는 의병 150여 명을 이끌고 장수군에 주둔한 일본군·경찰을 습격하고 주재소와 관청을 불태웠다. 1909년 4월 24일에는 용담군(전남 진안군 인근)을 공격하였고, 5월에 남원 이문성 인근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8월에는 의병을 이끌고 충북 영동과 옥천까지 진출했으며, 10월 30일에는 옥천군에 있는 경부선 이원역을 폭파하고 일본군 포로 3명을 잡는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말 문태서 의병대의 활동 범위는 경남 거창과 함양 등 지리산 일대와 영동, 옥천, 청주 등 충청 내륙지역, 더 나아가 경북 상주까지 이르렀다. 이에 문태서는 다시 각지 의병을 총 결집해 서울진공작전을 펼치려 했다. 당시 의병은 따로 군복이 없었기 때문에 외관으로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다. 문태서는 전국 의병을 장사꾼, 노동자 등으로 위장해 서울에 모아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군을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문태서의 대담한 계획은 일본에게 들어갔고, 일본은 각 관문과 항구, 서울 요지에 무려 1만 명이 넘는 군을 동원해 물샐틈없이 감시망을 펴자 문태서의 서울진공작전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후 '남한대토벌 작전'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대규모 의병 토벌이 시작되고 호남 곳곳에서 민간인 대량학살이 잇따르자 문태서는 일단 의병대를 해산하고 지리산-덕유산 일대를 오가며 후일을 기약했다. 문태서는 1911년 8월 17일 매부의 집에 들렀다 일본군에 체포된다. 그는 1913년 감옥에서 자결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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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 일진회원들.

문태서 의병대를 제외한 경남지역 의병들은 일본군에 처절하게 짓밟혔다. 일본군 14연대가 남긴 '진중일지'에 따르면 당시 일본군의 의병 토벌 상황이 상세히 나와 있다. 유종환 의병대는 덕유산에서 일본군 중대와의 전투에서 이끌던 의병 140명 가운데 37명 이상이 죽었으며, 이후 거창에서 일본군에 쫓기다 사살당했다. 김동신 의병대의 중간 지휘관이었던 문태익은 1908년 5월 25일 거창 백련사 인근에서 일본군과 마주쳤다. 당시 일본군 14연대 거창수비대 7중대원은 30여 명에 불과했고, 문태익 의병대는 100명이 넘었으나 무려 76명이 죽었다.

이처럼 일본군 14연대와 의병대는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모두 화력이 앞선 일본군의 압승으로 마무리됐다. 일본군 14연대는 근 2년 동안 경남과 경북에서 의병을 토벌했는데, 입은 피해는 사망자 0명, 부상 17명에 불과했다. 반면 의병은 사망 852명, 체포 145명에 달했고 부상자는 셀 수 없었다. 게다가 일본은 의병전쟁 도중 약 4000명에 달하는 헌병보조원을 채용했다. 지역 주민, 투항 의병으로 구성된 헌병보조원은 일본군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고, 일본군은 이들을 앞세워 안방 드나들 듯 경남 각지를 누볐다.

의병대의 활동은 주로 경남 서부내륙 지역에 집중됐다. 일본군 14연대는 총 108차례 의병대와 전투를 했는데, 하동군 32건, 산청 18건, 함양 11건, 거창 10건, 합천 8건 등이다. 함안엔 아예 의병대와 전투가 없었으며, 양산·동래·의령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경남지역 의병대의 마지막 전투는 1909년 5월 8일, 함양군 덕유산 자락에서 있었다. 문태서-박춘실 연합 의병대와 일본 수비대와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13명이 죽고, 9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그 가운데 박춘실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호남에서는 1913년까지 끈질기게 의병전쟁이 이어졌고, 일본군과 장기간 싸우면서 얻은 경험은 훗날 독립군에게 이어졌다.

안중근을 모욕한 경남 사죄단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이 의거는 당시 전 세계적 뉴스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동양 근대화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대한제국은 벌집 쑤신 듯 난리가 났다. 순종 황제는 조의금으로 13만 원을 하사하며 "그는 동양평화의 지도자이며 또 실로 우리나라 개발의 일대 은인"이라고 칭하며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내각은 추모단을 꾸렸으며, 이어 일진회를 비롯한 친일단체를 중심으로 이토 히로부미 추모 열기가 이어졌는데 경술국치 이후에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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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행렬.

각 지역에서는 "이토 공은 동양평화와 황색인종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한 위대한 인물"이라며, 이토 히로부미의 피살을 사죄하기 위한 사죄단을 꾸리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사죄단 구성은 전국 13도 지역유지들이 모여 사죄단을 결성하고, 일본에 건너가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 일가, 일본 정부에 사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있을 경술국치에 대비해 일본에 눈도장을 찍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사죄단에 참여한 소위 '경남지역 대표'는 다음과 같다. 최한범(경남도 사무), 정병식(훗날 합천군 초계면장을 지냄), 최해규(언양군), 정연호, 고채순(용남군 참사), 이상욱(훗날 경남토지조사위원), 민인호(훗날 함안·함양·밀양 군수를 지냄), 허종흠(지방위원회 위원) 등이었다. 그러나 경남 사죄단은 주최세력 간 갈등과 막대한 여비 때문에 직접 일본에 방문한 이는 최해규 1명뿐이며, 전국적으로도 8명에 불과했다.

참고문헌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조선왕조실록>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 「한말 경남 서부지역의 의병활동」, 홍순권 『지역사회연구』 5호, 1997

- 「한말 경남지역 의병운동과 일본군의 의병 학살」, 홍순권, 『군사연구』 제131집, 2011

- 블로그 <역사공간> blog.daum.net/jen-koje

- <한국독립운동사 자료7>,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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