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지음
나의 뿌리 그녀, 마주하는 순례길
소설가 김탁환 엄마 이야기
고향 진해 곳곳에 담긴 추억
사계절 함께 걷고 대화 기록

카페에서 마주한 '엄마'.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고 별안간 눈물을 흘린다. 친구 한 명이 먼저 떠났단다. 10년 전 10명이서 시작한 계는 이제 5명만 남았다. 엄마에게도 어쩌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미뤄뒀던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1942년 나고야에서 태어난 엄마는 1946년 귀국선을 타고 들어왔다. 진해 도천초등학교, 진해여중, 진해여고를 졸업했다. 이후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결혼했다. 아버지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직전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월남했고, 진해 도천초등학교, 진해중, 진해고를 거쳐 한양대 졸업 후 면도기 회사에서 근무했다. 1985년 봄, 엄마는 남편과 사별했다. 아버지 나이 마흔여섯 살, 엄마 나이 마흔네 살이었다.

소설가 김탁환이 열여덟 살 때 엄마의 삶이다. 30년이 지나고 마흔네 살이던 여자는 일흔네 살이 되었다. 그 시간동안 홀로 아들 둘을 키우던 여자의 삶은 어땠을까.

당신의 삶을 글로 옮기고자 할 때 엄마는 아들 김탁환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진해를 함께 걸을 것을 제안한다. 엄마는 30여 년 전 남편과 걷던 길을 아들과 걷는다. 진해 골목을 걸으며 그곳에 깃든 추억과 함께 미처 듣지 못한 경험과 이야기를 쏟아낸다.

69년 전인 다섯 살 때 외증조할머니 손잡고 안민고개를 오른 사연은 압권이다. 겨우 다섯 살 어린아이 걸음으로, 이른 새벽부터 하루 꼬박 걸어 고개를 넘은 기억은 아직 선명하다.

진해 시내와 앞바다가 널리 보이는 탑산 길을 오르면서는 1968년 10월을 떠올린다. 아들 김탁환이 태어난 해와 달이다. 뱃속에 열 달을 품고, 출산 예정일이 지나도 나오지 않자 의사의 권유로 365계단으로 알려진 탑산 길을 오르락내리락했던 나날이다.

진해여중, 진해여고 시절 자주 거닐던 철길. 학창 시절 소풍 다녔던 지금의 내수면연구소인 양어장 길. 탑산길. 흑백다방 부근 산책길. 속천 바닷가. 장복산길에는 장소에 대한 짧은 상념, 단상과 함께 엄마와 나눈 대화가 골목길 따라 흘러나온다.

엄마의 삶을 상기할 때면 진해에 대한 김탁환의 기억도 함께 소환된다.

진해에서 가장 오래된 예술 찻집인 흑백다방은 조부모가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고 부모가 사랑을 속삭이던 곳이다. 김탁환에게는 장편 습작의 어려움을 달래던 문화공간이기도 하다. 첫 장편 탈고를 마치고 부푼 가슴으로 골목을 내달리던 새벽, 김탁환은 흑백다방 벽에 기대어 한없이 기뻐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추억 속에 마냥 머물 것 같던 엄마는 불쑥불쑥 아들을 향한 마음을 꺼낸다.

<엄마의 골목> 마지막 장에 소설가 김탁환(오른쪽)과 그의 엄마가 함께 웃는 모습이 담겼다.

교육사 담벼락을 지날 때 해군 장병 함성 소리가 들리자 걸음을 멈추고 1995년 3월의 기억을 툭 털어놓는다. 아들 김탁환이 훈련 받는 동안 교육사 담벼락을 서성이며 기도했던 어느 저녁을.

원해루에서 자장면을 먹을 때는 '인천 자장면'에 대해 묻는다. 김탁환이 개화기 인천 은행거리를 중심으로 쓴 소설에서 자장면을 먹는 대목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엄마는 아들 김탁환이 쓴 소설을 전부 다 읽었던 것. 그래 놓고는 읽지 않은 것처럼 말을 아꼈다. 엄마는 아들이 모르는 무엇을 얼마나 더 지니고 있을까. 아들은 그런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엄마와 함께 걸으며 뒤늦게 당신의 걸음 속도를 깨달은 김탁환은 새삼 엄마의 깊이를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스스로를 돌아본다.

엄마는 남편을 일찍 보낸 후 홀로 아들 둘을 키우는 동안 묵묵히 무게 중심을 잡아줬다. 철두철미하고 계획적인 엄마에겐 고독이 없을 줄만 알았다. 그랬던 엄마가 일흔이 넘어 배운 하모니카를 불며 일상을 위안한다. 어느 순간 삶과 죽음이란 단어를 자연스럽게 입에 올린다.

자식 앞에 그리고 세월의 흐름 속에 엄마는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이다. 김탁환이 첫머리에 쓴 글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 하지만 엄마도 약하다'처럼.

195쪽, 난다, 1만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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