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만 보면 버려지는 수험생의 책입시
지옥 벗어날 멋진 상상 몇가지

포항 지진으로 수능 날짜가 1주일 미뤄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의외의 부분에서 놀랐다. 근처에 핵발('원전'보다는 '핵발'이 적합한 명칭으로 보인다. 일본은 '원발'이라고 한다)이 즐비한 포항에서 지진이 난 것도 놀라웠지만 그 못지않게 놀란 것은 수능을 하루 앞두고 초읽기를 하던 수험생들이 시험공부 하던 책들을 이미 다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새로 생긴 1주일이라는 기간 뭐로 공부를 하느냐는 소식이었다. 시험을 보려고 하는 공부. 지혜를 구하고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오로지 남보다 점수를 더 따기 위한 공부. 시험만 보면 버려지는 책. 새삼스럽지만 정말 놀라웠다.

문득 존 레넌의 '이매진' 가사가 떠올랐다. 대학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존 레넌은 천국과 국가와 종교가 없으면 지옥도 없고 전쟁도 없고 굶주림도 없지 않겠냐고 노래했지만 우리나라에 대학이 없으면 청소년들이 얼마나 행복할까. 명작소설도 읽고 운동도 하고 연애도 오지게 하고 여행도 맘껏 하면서 젊은 날의 기개를 맘껏 펼치지 않을까. 지금의 대학이 없어진다면 난리라도 나는 줄 아는 사람들은 거품을 물고 반대할 것이다. 그러면 대학은 놔두자. 대신,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최저임금을 지금보다 두세 배 올린다. 고등학교 졸업자가 직업학교 2년 정도 다니고 현장 경력 2년 쌓으면 대졸 초임과 같은 월급을 준다. 이후 승진에서도 불리하지 않고. 최저임금제뿐 아니라 최고임금제(소득상한제)를 정해서 대기업 회장도 월급이 최저임금의 20배를 넘지 않게 해서 초과금액은 80% 정도 세금으로 걷는다. 돈을 더 벌고 싶으면 최저임금을 올리게 한다. 그 대신 업무수행비나 연구개발비는 공식적으로 얼마든지 지급한다.(참고로 2015년에 최저임금보다 무려 2717배나 많은 소득자가 있었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에 상한을 넘는 소득의 77%를 세금으로 걷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입시지옥과 시험만 보기 위한 공부는 사라질 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이 뭔지 제대로 맛보게 될 것이다. 세계 최고인 청소년 자살률은 뚝 떨어질 것이고 평균 출산율도 올라갈 것이다. 학원과 야간자율학습 교실에서 해방된 청소년들이 세상의 활력을 북돋울 것이다.

그래도 공부에 소질이 있어 더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원 없이 공부를 하도록 나라에서 전폭 지원하면 된다. 어떤가. 이런 상상이 재미있지 않은가.

내친김에 상상의 나래를 더 펴 보자. 영어가 없다면. 전기가 없다면 또 어떨까? 시민단체나 전문가들이 'GMO 반대'라 쓰지 않고 '유전자조작식품 반대'라 쓰겠지. 농민단체가 '한미 FTA반대'라는 머리띠 대신 '한미 자유무역협정 반대'라는 머리띠를 두르겠지. 그러면 한글도 잘 모르는 나이 든 농협 조합원들도 뭐 하자는 건지 금방 알겠지. 혼자 두리번거리며 얼굴 붉힐 일도 없고.

포항에서 '필로티 건물' 때문에 지진 피해가 컸다고 하는데 기자들이 '다릿발 건물' 때문이라고 기사를 쓴다면 나도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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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없는 세상이라면 밤일도 없고 해가 지면 다들 쉴 것이다. 조류독감으로 닭이나 오리의 대량살육도 없을 게 분명하다. 농한기도 없이 한겨울에도 일하는 농부도 없겠지. 수능을 절대평가로 바꾸고 일제고사를 없애고, 논술제도를 또 바꾸고 하는 대책들도 사실은 교육문제를 푸는 근본이 되지 못한다. 학력차별이 사라지고 기본소득제만 시행되어도 다 해결된다. 멋진 상상이다. 존 레넌은 이보다 더한 상상을 했다. 모든 인류가 형제처럼 세상의 것들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세상을 상상했다. 하나둘 모이면 쉬운 일이라고 했다. 모든 현실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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