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다 겉, 과정보다 결과 우선하는 현실
건강하고 희망있는 삶은 심층에 뿌리 둬

가을이 만연하고, 연말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이 우울해지고 긴장하게 되는 것은 올해 예상한 만큼의 기대나 열매가 시원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지상정인지는 몰라도 열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무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나무라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나쁜 나무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속보다는 겉, 과정보다는 결과,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조차도 부끄러움이 아니라 당당함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어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몰라도 이러한 현실은 결코 희망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지탱해 왔던 인정, 의리, 상부상조와 같은 근간들이 하나씩 무너지면서 이제는 뿌리 없는 나무 꼴이 되어버렸으니 하루하루를 넘긴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세상이 이런 꼴이라면 최소한 종교라도 보이는 표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층에 있어야 할 텐데 종교는 물론이고 종교인마저도 표층이 전부인 양 목을 매고 있으니 이 자체도 절망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표층이 본(本)이 아니라 심층이 본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세상과 종교를 넘어 우리가 모두 앞을 다투어서라도 심층에서 만나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기적이고 나 중심적인 표층이 파멸이라면 이타적이고 너 중심의 심층이 구원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가 종교를 기독교, 불교, 유교 등으로 나누지 않고,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로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매는 나무의 몸부림이고, 열매는 몸부림의 진실이고 그리고 열매는 나무의 진액입니다. 그런데 몸부림, 진실, 진액과 같은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이런 비밀스러운 것 없이는 좋은 열매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정과 열매가 하나이고 심층과 표층이 둘이 아니지만 과정이 열매를 결정하는 것처럼 심층이 표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易)도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열매를 아무리 포장한다 하더라도 진실에 이를 수 없고, 회칠한 무덤 이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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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의 형태가 점점 더 표층으로 기울어지고, 모든 가치 또한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려고 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고, 희망이 있는 삶을 원한다면 표층을 떠나 심층으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이 일이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일일지라도 자신을 버리는 거기에 생명이 있고,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를 살리는 능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열매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는 표층을 포기하고 심층에 뿌리를 둔 나무만이 맺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지금 우리가 모두 가을의 끝자락에 서 있을지라도 표층이 아니라 심층에서 만나게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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