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감추고 방관하면 2차 폭력 이어져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말하고 공감하기

불편하지만 살아오면서 겪은 성추행의 기억을 한번 떠올려보자. 중고등학교 시절 상담하면서 자연스럽게 허벅지에 손을 올리고 브래지어 끈을 스치며 등을 두드리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여성에게 있을 것이다. 취업 후에는 직장 상사로부터 학창시절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버스 안에서 혹은 길에서 몸을 아래위로 훑는 불편한 시선과 마주하고, 엉덩이를 만지거나 가슴을 치고 가는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된다. 여성의 일상이 성희롱과 성추행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폭력에 대해 여성들은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말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했다. 추행이 더 큰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 안도했고, 여성이면 으레 겪는 일이라 생각했다. '똥 밟았다' 생각하며 넘겨 버리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 편함을 가장한 침묵이 일상적 폭력을 방관해왔고, 그것이 불안과 공포로 되돌아오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잘살고 있다.

얼마 전 있었던 '미투(#Metoo)' 캠페인을 보며 이런 침묵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견고한 권력으로 좀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은 여러 여성의 성폭행 증언으로 현재 체포될 위기에 놓여 있다. '말하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투(#Metoo)' 캠페인은 우리나라에서도 유효할까? 성폭력 피해자들이 성폭력 사실을 말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성범죄의 특성상 목격자나 결정적 증거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성폭력의 70%는 아는 사람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피해자가 성폭력 사실을 말하는 순간 '꽃뱀'이라는 의심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성폭력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에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이러한 2차 피해이다.

논란이 된 한샘의 성폭력 사건 또한 이러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피해 여성의 고소 취하로 마무리되었던 이 사건이 다시 공론화된 것은 복직을 앞두고 회사 내에서 '꽃뱀' 혹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현재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은 성관계 사실은 인정하지만 강제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합의된 관계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여성이 정말 '꽃뱀'인지, 이 남성이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은 이 과정을 고스란히 겪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피해 여성들은 무고로 고소되어 하루아침에 피해자에서 피의자가 되는 현실적 두려움에 놓이게 된다. 한샘의 성폭력 사건으로 터져 나온 현대카드 성폭력 사건 역시 현재 피해 여성은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고소당한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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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Metoo)' 캠페인은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필요해 보인다. 지난 5월 상관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한 해군 대위와 같은 일을 반복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더 이상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을 견디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말하고 공감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의 '말하기'는 우리가 방관했던 문제들을 직면하게 만들 것이다. 성폭력 사실을 말한 여성에 대한 의심과 비난을 거두고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있도록 경청하고 함께 분노하고 지지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에겐 '미투(#MeToo)'가 아니라 '위투(#Wetoo)'가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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