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공장에는 개 아홉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가 있다. 개와 고양이 마릿수는 그들이 새끼를 낳거나 분양하거나 불의의 사고로 생을 등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미개 한 마리였지만,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아서 먹여야 할 입이 이처럼 늘었다. 고양이들은 식사를 마치면 으레 사냥연습을 겸한 개구진 장난질을 하다가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 가장 편한 자세로 늘어지게 낮잠을 청한다. 어린 개들은 표정이나 몸짓 하나하나가 천진하고 개구지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온갖 것을 물어뜯고 땅을 파헤친다. 어떤 땐 먹는 것도 놀이로 느껴질 때가 많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 개나 고양이가 다가와서 함께 놀자고 몸을 비비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종종 그들 눈에 비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노동과 인간의 삶을. 동물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은 확실히 낯설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색한 것은 겉에 옷을 걸쳐 입는 것과 쉬지 않고 일을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동물들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특징 중 하나는 소유개념이다. 하늘을 나는 새나 집에 키우는 고양이는 모두 하늘과 땅의 경계를 모른다. 인간은 자기 밭에 열린 감을 따 먹은 까마귀를 죽일 수는 있지만 법정에 세울 수는 없다. 인간이 철석같이 믿는 소유개념은 인간 사회의 것이지, 자연과는 무관한 것이다. 동물들이 마음껏 게으를 수 있는 건 소유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소유를 모르기에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다. 먹이 활동과 짝짓기 활동을 제외하고 나면 놀이와 휴식만 남는 삶이 인간의 눈엔 게을러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원래 생명의 참모습이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사회와 계급이 생기고, 수천 년 동안 노동을 해왔지만 여전히 노동이 힘들고 하기 싫은 이유는 그것이 생명의 본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과 구분 짓는 인류의 특징을 흔히, 생각하는 인간(호모 사피엔스), 정치하는 인간(호모 폴리티쿠스), 예술하는 인간(호모 루덴스) 등으로 정리한다고 배웠지만, 나는 쉽게 동의가 안 된다. 최근에 밝혀진 과학적 상식에 따르면 동물들도 사고를 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동물들 사이엔 정치도 있고, 예술적인 활동도 한다. 인류의 특징 중에서 노동하는 인간(호모 파베르)이 빠졌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은 확실히 인류와 동물을 구분 짓는 기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특징이 더 진전된 것이라 말하기가 주저된다. 학교에서는 인간의 '노동'을 두고 '자아의 실현'이라는 고상한 말로 포장하기도 하지만, 현실의 노동은 생계비와 맞바꾼 저당 잡힌 시간(인생)일 뿐이다. 대개 노동은 자아를 실현하는 시간이기보다는 자아를 상실하는 시간이며 상품과 자아를 결합시켜 타인에게 빼앗기는 소외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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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다른 동물에 비해 털이 없어서 옷을 걸치게 됐는지, 옷을 걸치다 보니 털이 없어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는 옷을 입어서 털이 없어졌다(짧아졌다고) 믿는 편이다. 이는 인간의 또 다른 특징인 '소유'와 역사를 같이한다고 본다. 소유개념, 특히 땅에 대한 소유는 계급과 신분을 만들고, 신분 표시를 위한 장치로 옷이 발명됐다고 본다. 다시 말해 소유가 계급을 만들고, 옷과 신분 질서를 만들고, 노예 노동을 만들고, 오늘날 시간에 쫓기며 타인을 위해 인생 절반 이상을 허비하는 노동대중을 만든 것이다. 안락한 집과 좋은 차와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하려고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느라 정작 그것을 누릴 시간을 얻지 못하는 게 오늘날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이 더 인간답게 살려면 덜 일하고, 덜 소유하고, 덜 먹어야 한다. 대신 더 많은 시간을 빈둥거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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