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동 500번지] (4)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2부
재개발 철거 작업 중…남은 사람은 대부분 노인
풍파 견뎌왔던 주민의 애환·흔적이 깃든 동네
"보상받아도 월세 살아야"…세입자, 더 힘든 상황

철거가 진행 중인 회원동 재개발 지역에 남은 이들은 대부분 노인입니다. 오랫동안 이곳에 살아왔고, 재개발이 아니었다면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려고 했던 분들. 회원동이 아니면 이제 갈 곳이 없는 분들. 이분들이야말로 '회원동 500번지'로 상징되는 회원동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삼삼오오 골목에 나와 앉아 한 집씩 한 집씩 헐리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시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듣고 보니 회원동 옛 이야기는 지역 현대사 그 자체이기도 하더군요.

회원초등학교 앞 주택가 큰길(회원남14길)에 지금도 남아 있는 우물은 한때 왁자하던 회원동 500번지 공용 빨래터였다.

지금도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다.

어머니 때부터 100년을 넘게 회원동에 사신 90세 할머니가 운영하는 동네슈퍼.

"굶다가 묵다가, 굶다가 묵다가 했다. 여기 옛날에는 다 논밭이었다. 힘들게 살다가 이제 조금 살겠다 싶으니까 아파트 짓는다고 하고, 쫓겨나가야 하고, 돈도 제대로 주지 않고 갈 데도 없어서 이러고 있다. 남들 쇠고기 먹을 때 우리는 생선 한 개 못 먹고 살아도 그래도 여기 살기 편타 아이가. 아는 사람도 다 여기 있고. 근데 나가라 나가라 하니께 큰일 아니가."

우물가에 앉아 있던 한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 옛날 회원국민학교 시절 그 유명했던 '꿀차'를 팔던 분이시다. 고구마 빼떼기에 팥과 칡가루, 사카린을 넣어 만든 것인데, 당시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팔고, 학교 앞에서도 장사를 했다. 동중학교 시험치면 시험치는 교실 문 앞에 가서 장사했다고 하면 말 다했지. 20년 전인데, 부산에 갔다가 아이를 안은 젊은 사람이 나를 알아보더라고. 내를 우찌 아는데 하니께 아지매한테 사먹은 꿀차가 진짜 꿀인지 가짜 꿀인지 몰라도 맛있어예, 꿀차 많이 사 묵고 공짜로도 많이 묵고 그랬다 카더라고. 돈 말고 돌멩이를 집어넣고 꿀차 가져가려다가 내한테 많이 맞고 그랬다고."

매일 골목에 나와 있는 회원동 재개발 지역 노인들. 보상금을 받아도 갈 곳이 마땅찮아 근심이 많다. /유희진 인턴기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던 '우물가 슈퍼' 주인도 한마디 거든다.

"우리 어렸을 때 골목에서 놀기가 매우 좋았어요. 골목에서 놀다가 어른들이 야 인마, 하고 쫓으면 요리 몰려다녔다가 저리 몰려 댕기고 그랬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74명씩 해서 13반이야 한 학년이. 그 많은 사람이 다 어디 갔을까예."

회원2동 주택가 어느 조그만 구멍가게는 대대로 회원동에 살았다는 90살 할머니께서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여기가 고향이다. 우리 할매 때부터 회원동 여기가 고향이다. 둥구나무 있는데 거기서 살았다. 우리 클 때는 여기 전부 다 논 아니가. 옛날에는 집이 요래 없었지 논인데. 내가 일본을 갔었거든. 일본 강점기에 언니가 일본에 일하면서 살아서 울 엄하고 갔다가 해방돼서 나왔지. 그라고 장사를 했다. 장사 안 하면 먹고살게 없었다. 집 앞에서만 했는데, 어시장 가서 경매 받아와서 채소 팔고 했다. 이걸로 우리 손자들 대학 시키고 했다."

할머니의 아들 김의조(64) 씨는 한때 회원동에서 '건달' 생활을 조금 했다.

"젊을 때야 그 당시에는 싸움을 못해서 환장을 했죠. 싸움을 해서는 먹고살 길이 없어, 선거판에도 많이 뛰어 댕겨봤어요. 당시 선거판에 뛰어들면 제일 먹을 게 많았어요. 정당에서 돈이 착착착 나오니까."

그런 그에게 회원동 500번지는 쉽게 떠날 수 없는 고향이다.

"내 고향은 여기니까 가기 싫죠. 우리 외할머니 때부터 여기 살았으니까 말이 100년이지 1세기예요. 여기는 먹고살기가 좋은 곳이죠. 이 동네가 황금 땅이에요. 교통 편리하지 공원 있지, 무학산 가깝지요. 다른 데서 볼 때는 500번지 안 좋게 보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몸 건강하고 정신 건강하고 생활하기가 정말 좋아요. 조합원들은 어차피 나갈 거지만, 우리는 비조합원이고, 부모님하고 나하고 여기 죽을 때까지 살 겁니다. 억울해서 안갈 겁니다. 절대 안갑니다."

마루가 딸린 옛날 집에 사는 김조영(여·66) 씨 역시 힘든 시절을 세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이 집에 싱크대도 없었어. 아궁이 때고 해서 살았다. 그렇게 아궁이에서 연탄불로 바뀌고 다 그리 살았지. 화장실도 공동화장실 썼잖아요. 옛날에는 전부 공동변소지, 지금도 공동변소 있다. 회원1동도 전부 나래비 집이었는데 한우아파트 들어서는 바람에 집이 많이 개조됐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돈 좀 있던 사람은 한우아파트로 갔어요. 우리 또래가 수출자유지역에 처음 취직한 세대야. 나는 안 다녔지만 직장 생활할 때 자유수출이 들어서서 우리도 취직한다고 가고 그랬다. 그게 한 70년도쯤 됐을 거다. 그때 동경전자 시험치러 가고 그랬거든. 그 당시에는 자유수출 간 사람들 돈도 많이 받고 잘됐죠. 근데 그것도 30, 40년 지나고 나니까 내리막을 걷더라고. 이 동네 사람들 한일합섬도 들어가고 했다. 동네가 없어진다 해도 아직까진 실감이 안 나지만 나중에 다 없고 뜯기고 나면 생각이 나겠지."

비조합원 중에는 오래전 회원동에 겨우 조그만 집을 장만하고는 건강만 잘 챙기면서 노후를 보내려고 한 어르신이 많다. 이런 분은 보상을 받더라도 결국 도시 난민 신세를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한 동네 사는 친정어머니 반찬을 해주러 온 한 여성(43)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5살 때부터 40년 가까이 살았어요. 깨끗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보기는 좋겠지만 어릴 때 추억이 담긴 이런 동네가 있는 게 더 좋을 거 같아요. 추석이나 명절에 오면 어릴 때 살았던 기억도 나고 하는데, 그런 걸 없앤다고 하니까 씁쓸해요. 엄마 집도 평수가 얼마 안 되니까 처음부터 재개발을 반대했어요. 몇천만 원 받아도 어디 가서 전세도 못 구하고 월세밖에 안 되잖아요. 동네 살기도 좋고, 이웃들 마음도 좋고, 문을 열고 다녀도 괜찮고, 어르신들 그냥 놔두면 편하게 살다가 돌아가실 건데 말이죠."

더구나 세입자는 보상금이 훨씬 적어 더 곤란한 처지다.

방 2칸에 월세 10만 원을 준다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이 할아버지는 경기도 하남시에서도 비슷하게 쫓겨난 적이 있다.

"무조건 나가래. 장사하는 사람들 점방(가게)이 자기 평생직장이야. 한 달에 아무리 못 벌어도 20만~40만 원 버는데 쫓겨나가면 그것도 못 번다. 올해 여기 온 지 9년째, 10년 안 된 사람은 10원도 안 주고 나가라 하더라. 제일 피해보는 사람이 세입자야. 나가라는 전화가 왔었는데 못 나간다고 잡아뗐지. 원래 고향이 서울이야. 목수 일을 하는데 먹고살려고 여기까지 내려왔다. 내일모레 80인데, 이제는 일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해서 수급자가 됐지. 한 달에 한 50만 원 나오는 걸로 방세, 수도료 주고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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