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민심이 원했던 진실한 가치는 뭘까
역지사지·중도 이루려면 사(邪) 없애야

황금색 벌판이 휑하게 변하고 있다. 우리 교당 정원에도 봄여름 내내 서로 경쟁하며 꽃을 피워내던 왕제비꽃으로부터 수선화, 봉숭아, 채송화, 낮달맞이, 벌개미취 등등이 이제는 몸체조차 다 스러지고 마지막 상사화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더니 이제 겨우 국화 몇 포기만 남아서 쓸쓸하게 빈 뜰을 지키고 있다. 저 멀리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무학산 등성이도 울긋불긋 색깔이 많이 변했다. 조석으로 체감되는 바람조차 쌀쌀해져 스산한 늦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 봄에 새 잎을 피워내 여름내 무성했던 푸른 잎들이 노랗게 물들더니 이제는 하나둘 떨구고 있다. 이 낙엽들은 땅을 덮고 마침내 썩어서 내년 봄이면 다시 제 뿌리를 북돋울 것이다. 이런 가을이 오면 굳이 가을을 타지 않는 사람이라도 추연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가을은 사색(思索)의 계절인가보다. 가을은 괜스레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으로부터 시작해서 뿔뿔이 흩어져 무소식이 희소식이 된 형과 누나와 동생들도 생각나고 젊어서 출가의 뜻을 품고 동숙하면서 정진했던 동지 선후배들도 떠올리게 한다. 부모님 한 배에서 나온 혈육인데도 다 가는 길이 다르고 생각도 많이 다르다. 한 스승 문하에 동문수학한 동지들인데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마음이 편치마는 않을 때도 많다. 하물며 국가가 다르고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념 지향이 다른 사람들이 벌이는 사상이나 세력전은 치열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기는 하다. 촛불 1주년을 돌아보면서 그 과정에서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서 적폐청산을 두고 주장들이 요란하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촛불 민심이 원했던 진실한 가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시경(詩經)은 서경(書經) 역경(易經)과 더불어 원시 유교의 최고 경전이다. 공자는 시경에 실린 300여 수의 시들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생각이 사특하지 않음'이라고 주석했다. 이른바 사무사(思無邪)다. 생각에 사(邪)가 없으면 그게 절정의 시(詩)라는 말인 듯하다. 요즘처럼 물욕이 넘치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사익에 눈먼 세상에 그런 순수함이 가능할까? 사색의 계절 가을을 당해서 사(邪)없는 순수함을 가다듬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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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없는 한 생각이 천만 가지로 갈라지고 흩어져서 만 가지 생각들을 만들어낸다. 개인으로부터 세계평화에 이르기까지 주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없는 주장이 중요하다. 국가정책도 사가 없어야 정의가 된다. 남북통일 주장도 진보나 보수나 사가 끼면 본질과 거리가 멀다. 사무사(思無邪) 무불경(毋不敬). 사(邪)가 없으면 자기 생각에 집착하거나 편 가르지 않고 상대의 주장을 경청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가 되고 마침내 생각이 중도(中道)의 균형에 이르게 된다. 종교란 모름지기 사(邪)없음에 바탕해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통합해내는 인류평화의 도구다. 우리가 모두 본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한 형제들임을 일깨우는 최선의 수단이 종교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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