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개 주인 물어서라도 깨웠더라면
주인 감싸던 권력 충견들 불보고 짖기만

전북 임실군에서 남원시를 향해 옛 통영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길 잡아가다 보면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오수천을 건너는 다리 입구에 큼직한 개 동상이 서 있다. 궁궐의 해태 상이나 절 마당에서 탑신을 받치는 사자 상은 본 적이 있어도 개 동상은 처음이라 물어보니 개를 기리는 비석까지 있단다. 아니 웬만큼 난사람에게도 세워주지 않는 공덕비를 개에게 세워 주었다니 믿어지지 않아 찾아보았다.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원동산 공원에 비각까지 번듯한 비석이 정말 있다. 그것도 전북 민속자료 1호로 지정된 의견비(義犬碑)다. 지명까지 '개나무(獒樹·오수)'라 했으니 어린 시절 할머니 무릎 베고 들었던 주인을 구한 그 개 이야기가 그냥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었나 보다. 고려 문인 최자가 지은 보한집에 신라 시대의 거령현이었던 지금의 오수면에 살았던 김개인이라는 사람이 기르던 주인 구한 개 이야기가 있다. 옛날이야기는 똑같은 단방귀 이야기라도 들려주는 사람에 따라 방귀맛이 다르다니 할머니 입을 빌려 본다.

십 년에다 백 년 더하고 천 년도 더 넘은 옛날 꼬부랑 마을에 꼬부랑 영감이 한 사람 살았더란다. 이 영감이 꼬부랑 개를 한 마리 길렀는데 이 개가 참 영물이라 영감이 가는 데는 산이고 들이고 꼬부랑 깽깽 따라다니면서 산에 범을 만나면 제 잡아먹힐 듯 꼬여서 저 멀리 보내버리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밤늦게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더란다. 이러니 영감도 개를 끔찍이 아끼고 위하는 거야.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마실도 함께 다니고 그랬더란다. 이렁저렁 잘 살아가던 어느 날 산 넘고 물 건너 깨꼬랑 마을에 깨꼬랑 영감이 환갑잔치 한다고 연통이 왔어. 옛날에는 육십 넘기고 사는 것도 장수란다. 그래서 더 오래 사시라고 돌아오는 60갑자 생일날 크게 잔치를 베풀어 사람들을 대접했거든. 꼬부랑 영감이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개가 앞장서서 꼬부랑 산 넘고 물 건너 잔칫집을 찾아갔더란다. 이 대목에서 졸음에 겨운 할머니 말이 끊겨 그다음을 재촉하면 내가 잠이 들 때까지 꼬부랑산을 또 넘고 넘어갔다. 여하튼 깨꼬랑 마을에서 술이야 떡이야 뼈다귀야 실컷 대접받고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데 발걸음이 오거라 가거라 한다. 꼬부랑산을 겨우 넘어 냇가에 앉아 목을 축이고 나니 봄바람에 취한 삭신이 노곤하여 장죽 대통에 담배를 재워 물고 풀밭에 누웠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겠다.

뼈다귀 포식에 곁에서 늘어졌던 개가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손에서 떨어져 저만치 굴러간 담뱃대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오르며 마른 풀밭에 불이 붙은 거라. 주인을 깨우려 꼬부랑 깽깽 짖어보니 꽃잠에 빠져 무릉도원을 헤매느라 코 고는 소리만 동천한다. 안절부절 못하던 개가 강물로 뛰어들어 털을 흠씬 적셔 주인 주위를 굴러다니며 마른 풀을 적셨더란다. 봄바람에는 말똥도 굴러다닌다고 마른 바람 타고 거세지는 불길 속에 풀을 적시느라 물에 뛰어들기를 수십 수백 차례. 여기서 또 할머니는 재촉하는 내가 잠들 때까지 풍덩했다가 구르고를 반복한다. 온 산과 들이 다 타고나서야 무릉도원에서 깨어난 꼬부랑 영감이 둘러보니 제자리만 멀쩡하고 물에 젖어 곤죽이 된 꼬부랑개가 죽어 널브러졌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주인은 개의 의리에 감복하여 사람에게 하듯이 염습하고 입관해서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묘비 삼아 꼬부랑 지팡이를 꽂아두고 갔더니 몇 해 뒤에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더란다.

어차피 할머니가 들려주신 호랑이 담배 먹던 이야기니 천 년도 넘은 옛날에 담배가 있니 없니 따지지 말자. 그것보다 의로운 그 개가 좀 더 현명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짖어도 안 일어나면 주인이라도 팔이나 다리를 물어뜯어서 일단 깨워야 했다. 그러고 나서 물에 털을 적셔와 담뱃불로 난 불길에 뛰어들었다면 주인도 함께 도와 불을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산과 들이 다 타는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주인만 살리겠다고 제 목숨까지 바쳤으니 어리석고 안타깝다. 살아남은 주인인들 거센 불길 가운데서 연기와 화기를 마시고도 온전했을까. 살아도 평생을 시난고난 살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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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군주나 독재자 곁에는 의견(義犬)이 아닌 이런 충견(忠犬)들이 득시글했다. 그 충견들은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건 말건 제 주인을 위해서만 몸을 던졌다.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는 데 앞장선 친일 경찰은 4·19를 불러 이승만을 하야시켰다. 유신 공화국 선봉대 중앙정보부는 주인을 감싸려다 오히려 제 손으로 불을 댕겼다. 5공의 개는 주인을 위해 맞불을 놓았다. 온 나라가 촛불로 타오를 때 주인을 물어뜯어서라도 깨웠어야 할 그들이 요즘 불을 보고 짖어대고 있다. 의견은커녕 충견보다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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