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옷 걸친 가야산 자락 매혹된 채 걸음 옮기다보니
1200년 동안 이곳 지켰던 죽은 나무 한 그루 눈앞에
장경판전 속 법보 대장경 그 신비로움에 절로 벅차네

숨었던 가을이 고개를 치켜든다. 나 좀 봐달라며.

합천 해인사를 품은 가야산은 한창 가을이다. 깊은숨을 몸 안으로 들여보내면 내 몸도 곧 가을에 물든다. 도시인은 접하기 어려운 맑은 공기.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해인사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단풍 옷을 입기 시작했다. 산기슭을 따라 가야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평온 그 자체다.

바위에 빨간 낙엽이 하나 놓였다. 소중한 사람에게 책갈피로 선물하려고 덥석 줍는다. 가야산이라는 공간과, 가을이라는 시간이 이 조그마한 낙엽에 스며든다.

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앞 넓은 뜰 가운데 정중탑이 서있다. 정중탑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다. /최환석 기자

사람이 다니려고 놓은 길에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일부러 베지 않은 듯하다.

장수하늘소는 죽은 나무에 산란을 한다. 딱따구리에게는 사냥터다. 버섯과 이끼는 죽은 나무로부터 영양분을 얻는다. 족제비와 다람쥐는 은신처로 삼는다. 그러니 생을 다한 나무라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나름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

바다에 풍랑이 그치면 모든 형상이 온전히 비친다. 법계 실상을 본래 모습 그대로 자각하는 상태, 불교 경전 <화엄경>에 등장하는 '해인삼매'다.

해인사는 서기 802년(신라 애장왕 3년) 순응·이정 두 스님이 세웠다. 한국 화엄종 근본 도량이자, 대한불교 조계종이 지정한 최초의 총림(종합 수행 도량)이다.

가을 정취 가득한 해인사에서 만난 까치. /최환석 기자

불(佛)·법(法)·승(僧). 부처와 부처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전하는 스님을 뜻하는 불교의 삼보(三寶)다. 불교도는 스스로 부처가 되어 부처의 진리를 깨닫고 승가 정신을 구현함에 매진한다. 따라서 삼보에 귀의하는 자는 모두 불교도다.

해인사는 불교도에게 신성한 공간이다. 양산 통도사, 전남 순천 송광사와 더불어 삼보사찰 하나다. 통도사는 석가모니 사리를 모시고, 송광사는 승가의 가풍을 잇는다. 해인사는 석가모니 가르침을 새긴 팔만대장경을 봉안한다. 이른바 법보사찰이다.

법보를 껴안은 가야산은 곧 불교성지다. 주봉인 상왕봉(1430m) 중심으로 해인사와 더불어 24개 암자를 품었다. 봉우리를 굽이쳐 흐르는 홍류동 계곡 또한 일품이다.

절경에 매혹된 채 걷다 보니 어느새 해인사다. 일주문과 봉황문 단청은 주변 단풍과 곧잘 어울린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서로 물이 들었나 보다.

장경판전 나무 창살 사이로 햇빛이 관통하면 대장경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최환석 기자

일주문과 봉황문 사이에 예사롭지 않은 죽은 나무가 하나 있다. 신라 애장왕이 두 스님 기도로 왕후 난치병이 낫자 해인사 창건을 허하고, 이를 기념하고자 심은 나무라 전해진다.

1200년 동안 해인사 입구를 지키던 나무는 지난 1945년 생명을 다했다. 그러나 육중한 둥치에서는 아직도 기품이 느껴진다.

해탈문을 지나면 넓은 뜰이 나오고 가운데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54호 정중탑이 있다. 탑 뒤로 큰 법당이 섰다.

흔히 한 사찰의 큰 법당에는 부처나 보살상을 모신다. 보통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고, 중심이 되는 법당을 대웅전이라 칭한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으로 세웠기에 석가모니 부처가 아니라 화엄경 주불인 비로자나 부처를 모신다. 법당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다.

자연이 준 선물. 가을 낙엽은 책갈피로 알맞다. /최환석 기자

1818년 새로 지은 대적광전 안에는 일곱 불상을 모셨다. 왼쪽부터 철조 관음보살, 목조 문수보살, 목조 비로자나불, 본존 비로자나불, 목조 지장보살, 목조 보현보살, 철조 법기보살 순이다.

1769년 본존 비로자나불 이전에는 목조 비로자나불이 본존불이었다. 목조 비로자나불과 보현보살상, 문수보살상은 삼존불로 고려시대 가지가 셋인 은행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대적광전 위로 장경판전이 있다. 비로자나 부처가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인 형상이다. 장경판전 나무 창살 사이로 햇빛이 관통하면 대장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의 정취에 해인사의 절경과 대장경의 신비로움이 더해지는 순간이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글과 사진에 다 담지 못할 때 가장 괴롭다. 가야산과 해인사의 가을을 전하는 지금이 그렇다. 직접 보아야만 안다.

이날 걸은 거리 1.7㎞. 2699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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