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고달픈 삶의 흔적, 회원동 500번지] (2) 하모니카촌을 아시나요-일상
건축가 허정도·화가 이아성 "따뜻한 추억 많은 곳"
TV있는 가정은 동네 영화관 공용빨래터엔 여자들 북적
중등 교육 못받은 빈곤층 웨슬레고등공민학교서 공부

1980년대까지 회원동 500번지 일대는 그야말로 빈민촌이었다. 당시 다른 동네 사람들은 이곳을 심각한 우범지대로 여겼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건축가 허정도(64) 씨는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여선생님이 한 분 계셨어요. 자기 친구가 당시 마산시청에 있었는데, 본적지를 바꾸라 하더래. 주소를 회원동 500번지로 해놓으면 사회에서 활동하는 데 지장이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래요.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여기는 너무 못사는 지역이고 그러니까 사고도 자주 일어나고 범죄도 자주 나고 그러니까 이 동네에 산다 하면 안 좋게 본다고 그런 말씀을 하며 웃으시더라고요."

지지리도 못살던 사람들, 삶의 고단함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도 있었다.

▲ 좁은 골목은 회원동 500번지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던 놀이터다. /이서후 기자

이곳에서 태어난 서양화가 이아성(51) 씨에게는 지금도 충격으로 남은 사건이 있다. 그는 아버지가 '보림당 약방'이란 한약방을 해서 비교적 유복하게 자란 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쯤일 거예요. 같은 골목에 살았던 친구 집은 다리미 장사를 했어요. 아버지가 가내 수공업으로 다리미를 만들면 고용된 총각들이 몇 개씩 등에 지고 팔러 다녔어요. 근데 장사가 잘 안 됐는지 생활고를 못 이겨 아버지가 자살을 했어요. 500번지 기억 중에서는 제일 놀란 기억이에요. 그때를 생각하면 500번지가 정말 못사는 동네였다는 걸 새삼 느껴요."

◇아이들이 신나게 놀던 골목

하지만, 아이들은 판자촌의 복잡하고 좁은 골목이 신나는 놀이터였다.

"동네 중간 조그만 공터에서 좁은 골목을 연결하면 큰 원이 돼요. 이게 어렸을 때는 달리기 코스였어요. 각자 좌우로 출발하면 중간에서 교차를 하죠. 그렇게 4 대 4, 5 대 5로 릴레이도 하고 그랬다. 광장에 모여서 골목으로 막 뛰어다녔죠." 허정도 씨의 기억이다.

이아성 씨에게도 따뜻한 추억이 많다.

"어릴 때 쓰레기차가 오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하며 새마을 노래가 나왔어요. 그 노래가 나오면 어머니들이 모두 연탄재를 들고 뛰어나가서 버리던 기억이 나요. 당시 시장에 아주 큰 가마솥에 통닭을 튀겨 파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종이 봉지에 넣어서 줬는데 한 마리 3000원밖에 안 했어요. 우리 집에 TV가 있어서 인기 드라마 <여로>를 하는 날이면 마루에 동네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어요. 영화관이 따로 없었죠."

◇정겨운 회원국민학교 앞 풍경

당시 회원동 일대 아이들은 대부분 회원국민학교(현 회원초등학교)에 다녔다. 회원국민학교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져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다. 이 씨의 추억을 들어보자.

"한 학년에 10반씩, 학급당 학생이 60, 70명이었어요. 학교 앞에는 고바우문구점, 문화문구점 등 문구점이 줄지어 있었고요. 어릴 때 아버지가 고바우문구점에서 '왕자파스'(크레파스)를 사주셨어요. 12색 정도 들어 있었던 거 같아요. 다른 애들은 한 개를 사주면 1년을 썼는데, 저는 하루에 다 썼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참 좋아했던 거 같아요."

허 씨도 문방구에 연필을 사려고 줄을 서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이 씨는 학교 앞에서 노부부가 팔았던 '꿀차' 맛도 잊을 수 없다. 먹을거리가 없던 시절 아이들에게 최고의 간식이었다.

"고구마 빼떼기(삶은 고구마나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과자)에 팥 조금하고 엉겨붙는 갈분, 사카린을 넣어 만든 '가짜 꿀차'였어요. 지금도 친구들 만나면 꿀차 생각나느냐며 이야기를 해요."

회원초등학교 앞 지금도 남아 있는 우물은 동네 공용 빨래터였다. 이 씨는 사람들로 왁자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에는 말도 못하게 북적였죠. 동네 여자들이 모여서 이야기 나누는 곳이었고요. 아주 정다웠지요."

▲ 회원2동 공용화장실. 80년대까지만 해도 집에 화장실이 없어 이곳을 쓰는 사람 이 많았다. /이서후 기자

◇가난한 아이들이 다닌 고등공민학교

회원초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근처 웨슬레고등공민학교로 진학했다. 고등공민학교란 해방 이후 사회경제적 빈곤층이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생긴 비정규 중등과정 학교다. 50~60년대 마산에는 웨슬레를 포함, 구세군, 대창, 선화 등 5개소가 있었다. 웨슬레 고등공민학교는 당시 북마산교회(현 성은교회) 마당에 있었다. 1958년 개교한 마산고등공민학교가 전신이다.

1965년 웨슬레 구락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으면서 웨슬레고등공민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웨슬레는 영국 감리교회 창시자의 이름이다.

학교로 가는 유일한 골목길은 항상 물에 젖어 있었다. 바로 옆 두부공장에서 나온 것이다.

"질퍽한 진흙 바닥에 쥐가 죽어 있기도 했고요, 저는 그 길이 정말 싫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빙 둘러 피해서 가고 그랬죠." 이아성 씨의 회고다.

허정도 씨는 웨슬레에서 생전 처음 영어를 접하고는 굉장히 신기해했다고 기억한다. 허 씨에게는 두부공장 골목길이 신나는 놀이터였다.

"그 길이 응달이라 겨울이면 얼음이 꽝꽝 얼었어요. 그렇게 되면 썰매를 타기도 했죠. 약간 내리막길이라 썰매가 잘 나갔어요."

◇비만 오면 넘치던 회원천과 그 옆 둥구나무

회원 1·2동을 가로지르는 회원천에 대한 추억도 많다. 이 씨도, 허 씨도 어릴 적에는 목욕을 해도 될 정도로 물이 깨끗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시장이 생기고 생활용수가 그대로 하천으로 흘러들어가면서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무학산 자락과 바로 연결되다 보니 비가 많이 오면 항상 물이 넘쳤다. 이 씨는 1977년도 태풍 사라가 왔을 때를 기억했다.

"하천에 돼지도 떠내려오고 화장실에 물이 넘치고 난리가 났어요."

허 씨도 하천으로 집이 떠내려오는 것을 봤다고 했다.

회원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커다란 둥구나무가 나온다.

수령은 300년에서 500년 사이로 추측한다. 나무 옆에 비석이 몇 개 서 있는데 이 중에는 5·16 군사혁명 공적비도 있다. 1999년 시민단체가 이 비석을 철거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아성 씨는 지금도 둥구나무를 더러 찾는다.

"저녁에 가보면 지금도 둥구나무에 기도를 하시는 분이 계세요. 아마 철거하면서 없애면 큰일 날 것 같아요. 살릴 것은 살려야지요."

그는 재개발 현장을 착잡한 심정으로 보고 있다. "재개발 과정을 보니까 마음이 아파요. 우리 가족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동네예요. 다 사라지고 아파트만 들어서면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요?"

[참고 문헌]

논문 <마산지역 고등공민학교의 역사적 고찰> (이영옥,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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