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물줄기로 빚은 명작 '돌개구멍' 댐
만들면 고스란히 잠겨버려

10월 마지막 주말, 지리산 단풍 명소를 다녀왔다. 오랜만에 들른 칠선계곡과 벽송사에 이어 청학동과 회남재 숲길을 걸으며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지리산의 가을에 푹 빠졌다. 벽송사 가는 길에 용유담에 잠깐 들렀다. 1980년대 초, 마천중학교 교사 시절부터 자주 찾았던 추억의 장소다. 여전히 아홉 마리 용(龍)의 전설을 믿어도 좋을 만큼 빼어난 명승이다.

무엇보다 그 윗자락에 형성된 포트홀(pothole)군(群)은 수십억 겁의 세월 동안 지리산 물줄기가 빚은 세계적인 자연문화유산이다. 지리산은 이렇게 자신의 흔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록하여 명작을 남겼다. 그가 쉼없이 토해낸 크고 작은 물줄기는 그가 가진 가장 역동적인 언어였던 것이다.

포트홀을 '돌개구멍'이라고 한다. 우리 선조는 포트홀의 생성 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회오리바람을 돌개바람이라 하듯이 돌개구멍의 원인을 소용돌이라고 본 것이다. 돌개구멍 속에는 몽돌모양의 돌이 채워져 있는 경우도 있다. 하상에 움푹 팬 자리가 있으면 여기서 소용돌이가 발생한다. 이른바 와류(渦流)다. 물결에 떠내려가던 돌이 여기에 빨려들면 빙글빙글 돌면서 다듬어질 것이다.

지리산 심원계곡, 뱀사골, 한신계곡에 이어 마지막으로 칠선계곡의 물줄기가 합수되면 곧장 용유담으로 흘러들어간다. 길고 깊은 지리산 종주 능선의 북쪽 사면이 모두 유역면적인 셈이다. 장마철과 같은 우기에 엄청난 양의 급류가 용유담으로 유입되면 그만큼 와류의 회전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이렇게 소용돌이의 에너지가 커지면 커질수록 더 큰 돌을, 더 빨리, 더 자주 회전시킬 수 있기 때문에 돌개구멍은 점점 더 커지고 깊어지지 않았을까?

특히, 이곳은 폭이 매우 좁은 협곡이기 때문에 물길이 거의 변할 수 없는 지형이다. 이렇게 좁은 병목에 유구한 세월 동안 에너지가 큰 급류가 지속적으로 흘렀으니 지금과 같은 거대한 자연유산을 탄생시킬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고 생각된다.

지난 2014년 가을, 일본 지질학 발상지로 알려진 사이타마현 지치부(秩父) 지질공원(geopark)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매년 900만 명 이상이 찾는 지질관광(geotourism) 명소다. 이곳 나가토로(長瀞)지구에 가면 지질명소(geosite)로 지정된 유명한 포트홀이 있다. 직경이 1.8m, 깊이가 4.7m로 일본 제일이란다. 그런데 용유담에는 지름이 3~4m에 달하는 초대형을 포함하여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것이 수십 개에 달한다. 이미 영월 요선암의 돌개구멍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만큼 용유담 포트홀도 그 가치를 새롭게 조명받았으면 한다.

매일 보는 평범한 산과 강도 그것이 언제 형성되었고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과정과 역사를 음미하면서 바라보면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이 보이고, 그것을 사랑하고 보전하려는 마음도 싹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질공원의 발상이다. 우리 주변의 특이한 암석이나 지형 등을 이렇게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지질명소로 지정·보전하는 것과 함께 이를 교육과 관광, 산업자원 등에 활용함으로써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견인하는 것이 바로 지질공원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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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은 전통 한옥과 서원, 정자와 같은 비지질명소가 많은 고장이다. 또, 국립공원 지리산과 덕유산이 있기 때문에 볼 만한 지질명소 또한 풍부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지리산댐이다. 이것이 건설되면 용유담의 명승은 물론 세계적인 지질유산이 고스란히 수장된다. 아니, 지난 20억 년 동안 지리산이 애써 남긴 이 땅의 자연과학사가 통째로 사라진다. 용유담은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다. 지리산댐을 중지하고 명승 지정과 함께 함양을 지질공원으로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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